정지선 시민기자와
1. 생애사
(1) 인적 사항
1) 이름 ; 김태욱 2) 생년 ; 1949년 3) 태어난 곳 ; 계양구 작전동
(2) 부모님에 대한 기억 ; 아버님은 20대 초반에 경찰에 투신하시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집을 떠나 생활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고 제사 때 등 특별한 날만 작전동 집에 들리셔서 몇 시간 후에는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부평경찰서 근처 숙소로 돌아가시곤 했다. 일년에 한번쯤이나 집에서 주무실 때 나는 철도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자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오시는 날은 아버지를 맞기 위해 음식 준비하느라 분주하셨고 아버지는 모여든 동네사람들과 얘기하기 바쁘셨다. 어머니와는 물론 자식들과도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우리 동네는
김씨 집성촌이라 이웃들과도 늘 가까이 지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밤 12시가 지나서도 같은 동네 집안들에 제삿밥을 갖다 드렸다. 당시에는 흰 쌀밥과 고깃국은 제사 때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밤중에 온 제삿밥을 누구나 벌떡 일어나 맛있게 먹었다. 나도 밤 중에 제삿밥을 나른 적이 많았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는 조그만 방이 셋 있는 조그만 초가집에 작은 집과 함께 살았는데 그나마 바깥방은 일꾼이 차지해서 실제로는 한 집이 한 방에서 생활해야 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우리는 전에 같이 살던 집을 작은 집에 드리고 아랫마을에 큰 기와집을 사서 옮겼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작은 집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우리들을 보살피셨고 늘 동네일에 적극 앞장서셨다.
농사는 주로 작은 아버지가 일꾼을 두고 지으셔서 우리 식구는 실제로는 농사와는 별 관계없이 텃밭 조금만 어머니가 가꾸며 살았다. 당시에는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나 우리는 아버지가 공무원이라 월급을 타니까 동네에서는 그런대로 생활이 나은 편이었다.
(3) 형제 자매에 대한 기억 ; 우리는 3형제에 누나가 한 명인데 형 둘은 그런대로 공부를 잘 해서 당시에는 가기 힘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다녔다. 누나는 공부가 좀 쳐져서 고등학교까지만 다니고 가사를 도왔다.
아버지는 나를 엄청 편애하셨다. 형과 누나들도 작전동에서 동인천역 근처 중,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는 신경도 안 쓰다가 내가 중학교 들어가자 그 때서야 동인천역 근처에 방을 얻어 주셨다.
아버지는 누나는 물론 형들도 공부를 못한다고 꾸중만 하셔서 모두들 무서워했고 나는 형들이 모두 떨어진 인천중학교를 한방에 합격했고 말썽도 안 부리고 말없이 모든 일을 하는데다 막내에다 외모와 성격도 아버지와 닮았고 심지어 생일까지 일주일 간격이라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형, 누나는 학자금 받는 것도 눈치를 보았지만 나는 용돈까지 쥐어 주셨다.
언제나 형들의 등록금 받아 오는 건 나의 임무였다.
당시의 분위기가 그렇기도 하였지만 아버지는 가족 누구와도 같이 돌아다닌 적이 없었지만 나는 부평시장 일대를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부평경찰서에 20여년을 근무하셨기 때문에 부평 일대에서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엄청 많았고 이제야 인천중 들어간 아들 데리고 다니며 어깨를 으쓱대셨을 거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4) 초등학교 수석 졸업 당시의 기억
나는 우등상은 계속 받았지만 체육, 자연을 잘 못해 5학년까지 반에서도 1등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다가 6학년 때 처음으로 1등을 했고 수석 졸업으로 도지사상(당시는 인천이 경기도라서)을 수상하게 되었다.
집에도 잘 안 오시는 아버지가 졸업식 단상에 떠억 앉으시고 내가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했다.
나는 어려서 당시 기억이 없지만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졸업식이 끝난 후 아버지가 교장실에 들어갔는데 교장선생님께서 좋은 날 춤 한번 추라고 하시니 거기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고 하니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알만하다.
졸업식을 끝내고 어머니가 학교가 있는 계산동에서 작전동 우리 집으로 걸어 오는데 밭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어머니를 몰라보고 ‘도지사상 타고 답사까지 하는 저 아이의 부모는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을 듣고 어깨가 으쓱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막상 나는 상을 다섯가지나 타서 좋기는 하였지만 감각이 무디고 내성적인데다 어려서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5) 중고교 때 통학 또는 등교와 관련된 이야기
1964년 인천중학교 입학식 때는 아버지가 작전동에서 학교가 있는 동인천역 위 전동까지 택시를 같이 타고 갔는데 당시 택시는 완전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고 사랑했는지 알 수가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작전동에서 동인천역까지 버스를 타고 통학했는데 국민학교 때 키 순서가 1번이다가 중학교 들어갈 때는 10번까지 올라갔지만 박촌동에서 출발한 시내버스(노선이 딱 하나 뿐)를 타고 다니기에는 키가 작아 만원버스에서 숨쉬기도 힘들었고 그나마 계산동에서 꽉 차면 작전동에서는 무정차 통과하는 일이 허다해서 부평시장까지 걸어가서 타기도 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가 2학년 때 동인천역 배다리 근처 창영동에 방을 얻어 주셔서 거기서 자취를 하고 누나가 살림을 맡아 했다.
중 3 때는 아버지가 부평경찰서에서 지금의 배다리철교 바로 밑에 있던 창영동파출소 소장으로 오셨는데 내 자취방에서 딱 등굣길에 있어 늘 아버지를 보며 다녔고 직원들이 아버지한테 ‘얘 용돈 좀 주라’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때는 가끔 아버지가 우리 자취방에서 주무시기도 하였다. 당시는 셋방 계약기간이 6개월이라 창영동, 송림동, 숭의동을 돌며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부평시장 근처에 방을 얻어 네군데나 돌아다니며 경인선 기차로 통학을 했다.
고 3 때는 드디어 부평시장에 있던 또하나의 우리집으로 들어와 공부를 했는데 바깥 상가에는 술집을 세를 주어 젓가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안채에서 공부만 열심히 했었다. 목표가 뚜렷하니 소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6)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에 대한 기억
국민학교 때는 옆집에 나하고 같은 학년인 친구가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하루 종일을 늘 붙어 다녔다. 학교도 같이 가고 숙제도 같이 하고 놀기도 같이 했다. 나는 늘 우등생이었지만 그는 늘 쳐져 있었다. 집중력의 차이라고 본다.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없어 나는 별로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중학교 때는 한집 건너에 살던 동기 여자아이를 짝사랑도 해봤다. 용기가 없어 말 한번 제대로 걸어보지 못했다. 그 녀는 몸빼바지를 입고 있어도 눈부시게 예뻤다.
중 3 때인 1963년 나에게 처음으로 팝송을 알려준 석용배라는 친구는 다음 해 인천 앞바다에서 물 들어오는 걸 모르고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앞, 옆에 앉은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양승철은 숭의동 집 바로 옆에서 아버지가 못공장을 하셨는데 시험 때 여러번 그의 집에 가서 자면서 같이 시험공부를 했다. 부잣집이라 여기서 침대라는 걸 처음 보았다. 연세대 의대 비뇨기과 교수를 지냈다.
1학년 같은 반 최상근과는 처음으로 덕적도로 캠핑이라는 걸 갔었고 그의 본가인 청주에도 다녀올 정도로 친하게 지냈고 서울대 공대 조선항공과를 나와 지금은 미국을 오가며 항공기 설계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용현동에 살아 집에도 가끔 갔었고 인하대 공대 교수를 지낸 김건흥은 은퇴 후 사진학을 전공해 예술사진전문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상대를 나온 양태진은 인중, 제고에서 같은 반은 안 했지만 작전동에서 통학할 때 삼산동에서 같은 버스를 타고 다녀 친했는데 내가 좋아한 그 녀를 당시에 자기도 좋아했다고 한다. 졸업 후 ㈜한화 사장을 지냈다.
(7) 서울대 약대를 지망하게 된 이유
인천중, 제물포고 모두 인천의 우등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는데 여기서 상위 20% 이내를 꾸준히 유지해 서울대 약대에 지원하기에 아주 적당한 성적이었고 고등학교 때 부평시장에 있던 또 하나의 우리집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 바로 앞에 나의 중, 고 4년 선배인 윤운 약사님이 부평의 대표적인 약국인 수보당약국을 운영하고 있어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아버지가 고등학교 때부터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가 잦아 아버지의 병을 호전시키는 데 내가 일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을 제약학과(1회)로 진학하게 되면서 약국보다는 제약의 꿈을 꾸게
되었고 서울대 약대는 약국에는 관심이 없고 제약이나 연구에 대한 과목을 주로 가르쳐 졸업 후 제약회사로 진출하게 되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대학 4학년 때 돌아가셔서 별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
(8) 약학대학 재학 때의 추억
1967년 대학 1학년 1학기 때는 폐결핵으로 고생했고 2학기부터는 인천중, 제물포고에 약대까지 동기인 차연택, 김철수, 이주형과 늘 몰려 다니며 놀고 술 마시고 시험공부도 같이 했다.
그러다가 여자에 눈을 떠 인천에서 통학하던 인일여고 출신 숙명여대 약대 동기들 6명과 “Key Star Club”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어울려 다녔고 같이 용유도에서 캠핑도 했다.
여기서 더욱 발전하여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모든 약대생 모임인 “인천약대생총연합회”(인천약총)를 주도적으로 창립하였다. 이 모임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걸 같이 만든 약대 동기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중에 서울대 약대 교수를 지내며 한때 식약청장을 지낸 심창구 교수이다.
그는 제물포고는 나의 1년 선배인데 대학 2학년 때부터 급격히 어울리기 시작해 한때는 부평역 앞에서 6개월간 둘이서 자취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졸업 후 내가 서울 강북구 수유동으로 옮기고 1년 후 50m 옆에 집을 샀고 같은 예식장에서 같은 주례선생님을 모시고 6개월 간격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여기서 신혼 때 3년간을 아이들까지 같이 놀고 여름엔 소금강, 설악산 서울대 수련원으로 같이 가족휴가를 가기도 하였다. 설악산수련원에서는 근처에서 모여든 온갖 나비들과 함께 잠을 자기도 하였다.
대학 3학년 때인 1969년 3선 개헌 반대 시위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심창구, 이주형을 포함해 동기생 남녀 7명이 무주 九千洞여행을 2박 3일로 다녀왔다, 나제통문에서 버스를 내렸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 여관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돼지우리같은 방에서 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 일어나 구천동을 마디마디 즐기며 걸었는데 도중에 영화를 촬영하는 배우 박노식 씨 일행을 만나기도 하였다. 다음 날 백련사를 지나 산등성이에 올랐다가 강영혜 동기가 복통으로 1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늦게 하산을 시작했는데 어두운 밤에 랜턴을 준비하지 못해 길을 잘못들어 밤 12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고 나는 코피까지 쏟았다. 그래도 평생 이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고 즐거웠던 것 같다.
(9) 제약회사의 추억
1971년에 졸업하고 2년 후 제약회사를 알아보던 중 한국바이엘약품이라는 회사의 직원 모집 광고를 보고 외국계 회사라서 외국 유학도 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로 입사를 하게 됐다.
입사 시험에서 1등을 해 학술부로 가라고 했지만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바꿔 보고 싶은 생각에 내가 영업부를 강력히 원해 약국영업부로 가게 되었다.
입사 때는 인천 부평집에서 다녔으나 곧 서울 강북구 수유동으로 이사를 해 버스로 출퇴근을 했다.
처음에는 팀장이 맡고 있던 서울 중구와 성동구 지역을 인계받아 팀장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본받아 영업을 했는데 실적이 잘 나왔다.
팀 내 분위기도 좋아 월 초반에는 단체로 인천 월미도, 수원 딸기밭 등으로 신나게 놀러 다녔다. 이렇게 일주일 정도는 팀원들이 모두 뭉쳐 놀기에 바빴지만 그 후로는 각자 맡은 지역을 다니며 열심히 영업을 했다.
한국바이엘 출범 초기이기도 했지만 인수받은 60개 정도의 거래선 중 30개 밖에는 가동이 안 되고 있어 거래선 확장이 절실했다. 당시에는 오토바이나 승용차 등 개인이동 수단이 없어 걸어 다니고 가끔 버스를 이용해 이동했는데 하루에 30개 약국 방문을 강행했다. 초기에는 한달에 30개 신규 거래선을 확장하기도 했다.
이 때가 평생 가장 즐거웠던 시기이었던 것 같다. 퇴근 후 팀원들끼리 술자리도 많이 가졌고 가장 중요한 영업 실적은 항상 25일 경이면 초과 달성해 주문받은 것을 다음 달로 이월했다. 거래선에서 약사님과 술을 마시고 귀사하기도 했으나 원체 실적이 좋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이후 결국은 학술부로 끌려가 마켓팅을 하게 됐고 우리나라 최초의 항진균제
(무좀약) 카네스텐크림, 질정 개발을 주도했고 회사 경영이 어려워져 진급이 늦어지면서 다른 회사에서 과장 제의가 와 전직을 하게 됐다.
(10) 결혼 이야기
바이엘에서 나름 날리던 시절 중, 고, 대학 동기인 차연택과 잘 어울렸고 바캉스도 단 둘이서 떠나곤 했다.
1975년 여름도 단 둘이서 강릉 경포대해수욕장을 찾았다. 당시는 여관이 많지도 않았지만 돈도 없어 민박집을 찾아갔다. 우물가에 밥거리를 들고 갔고 여기서 친구들 네명이서 온 여자팀을 만나 밥과 반찬을 합쳤다. 저녁엔 같이 어울려 술자리도 가졌다. 차연택 약사는 개그맨 못지 않은 화술의 달인이었다. 여자들은 말끝마다 까르르 웃었고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다. 사흘인가를 이렇게 지내고 돌아왔고 애프터도 이어졌다.
누가 먼저 연락을 취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그리 적극적은 아니었다. 같이도 만났지만 우리는 어느 새 다른 친구들은 모르게 둘이만 3개월인가 밀애를 이어갔다. 크리스마스 쌍쌍파티를 차 약사의 동아제약 친구와 어울려 치뤘고 다음 해 2월 약혼식을 올리고 5월에 우리는 결혼했다.
2. 약국 역사
(1) 개국의 시작
약국 개설은 쉽지 않았다.
제약회사를 다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약국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자금부터가 문제였다. 당시 부평에서 이름을 날리던 수보당약국의 윤운 선배와 학익동 장약국의 장정일 선배로부터 한달간 현장 실습과 수련을 받았다. 우선 수유동집을 팔았다. 그래도 부족한 돈은 사촌처남한테서 빌렸다. 돈도 부족하고 전곡 처가에 다니기 쉬운 곳을 택해 1978년 강북구 미아4동 대지극장 뒤 골목에서 상록수약국을 시작했다.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약국을 꼬박 지켰다.
회사를 다니다가 이렇게 종일을 갇혀 있으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열심히 한 덕인지 골목에서도 그런대로 경영상태는 괜찮았고 빚도 다 갚았다. 이 때부터 글도 쓰기 시작했다.
약국이 안정궤도에 들자 좀 더 좋은 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오류동역 앞 대로 변에 권리금을 주고 버들약국을 인수했다. 이 곳은 전과 달리 유동고객이 많은 곳이다. 조제도 있었지만 드링크 등 매약이 많았다. 담배도 팔았다.
이 곳은 하루 종일 쉴새가 없고 시끄럽고 먼지도 많았다. 피로가 쌓이다 보니 간염에 걸려 설사를 하며 일주일을 고생하기도 했다. 일하는 재미가 없었다. 아이들은 둘 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미아동에서 우리를 떠난 후 여기저기를 떠돌던 어머니도 다시 모셔왔다.
내가 막내이긴 했지만 형들은 집안에 전혀 관심이 없어 내가 모든 집안일을 처리해야 하고 어머니도 고향인 인천으로 모시는 것이 노후를 보내기에 좋고아이들도 어려서 약국을 옮겨야 공부에 지장이 없을 것 같기도 하여 고향 인천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1984년 이주형 동기의 소개로 약국을 인천 서구 신현동에 새로 분양한 신현주공아파트 상가로 옮겼다. 어머니를 위해 단지 내에 우리집과 별도로 아파트를 마련해 드렸다. 단지 내라서 조제 위주이고 매우 조용했다. 처음으로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우리가 공부했던 캠퍼스는 창경궁과 떨어져 있지만 원래는 창경궁의 일부로 함춘원(含春苑)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곳 이름을 따서 함춘약국이라 지었다.
서울에서도 약간 약사회 일을 하긴 했지만 이 때부터 인천시약 약학위원장으로 본격적으로 약사회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중 나와 단짝이던 차연택 동기로부터 부평 산곡동현대아파트 입구에 생기는 현대타운이라는 쇼핑몰 내에 현대백화점 슈퍼마켓이 들어오고 그 안에 구내약국을 유치하는데 할 생각이 있냐고 연락이 왔다. 1987년 개점과 동시에 이전 개업했다. 현대백화점 부평점약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배로 확장한 현대타운 전관을 1994년 현대백화점 부평점으로 직영 전환하면서 현대백화점약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3천 세대의 현대아파트 내에는 약국이 없고 외부에서 유동고객이 모이는 백화점 약국이라서 입지가 매우 좋았다. 처음엔 현대타운 내 2층에 다른 약국이 있었지만 1994년 전관을 현대백화점으로 오픈하면서 없어져 완전독점상황이 됐고 연예인 초청 행사 등으로 외부 고객이 많아져 근무약사 포함 인원을 7명까지 늘렸고 잠시도 쉴새가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게다가 매주 월요일 휴무는 연중 이어지는 쎄일기간 중 취소되는 일이 허다하고 약국 근처 매장에서 핸드마이크 판촉활동으로 귀가 따갑고 말소리가 잘 안들릴 정도로 소음이 엄청나 40대 초반의 나이에도 피로에 젖어 살기 시작했다. 늘 몸살 기운이 몸을 감싸다가 38도에 이르는 100년만의 이상고온이 7월부터 추석까지 이어진 이 해에는 설날까지 전국적인 호황이 이어졌고 추석에는 차례 직후 곯아떨어져 성묘를 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1998년에는 3개월간 목소리가 사라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약국은 엄청난 활황이었으나 개인적으로는 끔찍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2000년 의약분업을 앞두고 백화점 내 의원이 없어 유지가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고 13년만에 과감히 약국 이전을 결심했다.
밀레니엄 해인 2000년 남동구 구월동에 전용 50평 대형약국을 인수해 미래약국이라는 이름으로 개설했다. 근처에 소아과와 내과, 정형외과가 있어 하루 180장의 처방전을 접수했고 매약 판매도 잘 됐다. 여기도 7명이 근무했다. 창고가 10평이고 2평 정도의 약국장실도 만들었다.
그러나 1년 후 내과, 정형외과 옆에는 새로운 약국이 들어섰고 더구나 2003년에는 말로난 나돌던 건너편 간석주공아파트의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이전이 불가피해졌다.
집에서 가까운 미추홀구 주안동 신기시장 뒤쪽 골목에 신축상가를 분양받았다. 2003년 6명이 근무하는 신기메디칼약국을 거창하게 개국했다. 같은 건물에 내과 등 서너개의 의원이 입주하기로 했으나 개국 한달 후 겨우 내과 하나만 개원했고 그도 경영 악화로 1년만에 철수해 버렸다. 청천벽력이었다. 의원을 유치하려고 2008년까지 노력하다가 포기하고 상가를 비운 채 이전을 결심했다.
2009년 1월 현재의 미추홀구 학익동 다사랑약국을 인수해 이전했다. 같은 건물에 있는 정형외과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뒤로는 대단지아파트가 즐비하고 2024년에는 길 건너에 대단지 아파트가 입주해 더욱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2025년 현재 현대백화점약국을 추월해 만 16년을 기록하고 있다. 다사랑약국으로 온 후 약사회를 비롯해 구청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마라톤도 시작하고 글도 많이 쓰고 40년 동안 발표한 글을 모아 평생문집도 발간했다. 이제 다시 전성기가 왔다.
3. 미추홀구에서 있었던 일
(1) 매스컴에 나섰던 일
1) KBS 1TV 시청자 칼럼 출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4년 KBS 1TV 시청자 칼럼에 출연한 일이다. 신기시장 내 신기메디칼약국에서 적자라는 유례없는 일을 겪고 있을 즈음 당시 경기가 안 좋아 많은 개인사업자가 유사한 상황에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이런 경우 정부가 어려운 사업자에게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에 대한 경감이나 유예 조치를 취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적자에도 해당 사업장 근로자의 최고 월급으로 보험료를 적용하는 현행 부과 기준이 부당하다는 내용으로 복지부 보험정책과와 연금정책과에 이에 대한 민원을 수없이 넣었으나 성의없는 답변만 돌아왔다. KBS 1TV에 민원 내용을 보내 출연을 신청하자마자 출연 요청이 왔고 약국에서 5시간 동안 촬영하고 방송국에서 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을 찾아가 이에 대책을 촉구하였으나 소득 파악이 안 돼 불가하다는 형식적인 답변만 되풀이했다. 이 방송으로 복지부와 공단에는 사업자들의 항의가 수없이 쏟아졌고 사회적으로 이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출연 소득일 뿐이었다.
2) 한겨레신문에 칼럼 <약국과 마트 사이> 기고
2011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약속과는 반대로 의약품의 약국외판매를 적극 추진했다. 약사회에서는 거센 항의 집회와 대국민 반대 서명을 이어갔으나 소득이라고는 품목 축소와 판매처를 마트에서 편의점으로 바꾸는 것 뿐이었다. 나도 이에 한 몫을 담당코자 사적으로 30편에 가까운 칼럼을 작성해 복지부와 국회 등에 제출했고 한겨레신문에도 이의 반대 칼럼을 게재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약사사회에서 많은 칭찬을 들었고 표창도 받았다.
(2) 저서 <횃불처럼 소금처럼>과 <약사가 말하는 약사> 발간
개국 이후 40여년간 약사 전문지, 일간지, 잡지, 라디오, TV 등 매스컴에 칼럼, 기행문, 수필, 약학 관련 많은 글을 발표했고 300편 가까운 글을 썼다. 인천시약사회 잡지와 신문 편집도 맡아 했다. 나이가 70을 넘기면서 이를 정리해 후손에게 남겨줄 생각을 하다가 김수현이라는 제물포고 후배 수필가의 권유로 2019년 평생문집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코로나팬데믹으로 연기해 2023년 완성해 <횃불처럼 소금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하게 되었다. 횃불은 선구자를 상징하고 모교인 서울대의 교표에 등장하고 소금은 양심을 상징하고 역시 모교 제물포고의 모표의 바탕을 이루며 나름 나의 성격과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해 사용하게 되었다.
<약사가 말하는 약사>는 2013년 지역약국 약국장 등 각 세부 분야 26명의 약사가 분담해 집필하였다. 약사의 업무와 근무 상황을 약대 지망생과 예비약사들에게 알려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약사 직업소개서이다. 나는 지역약국장 중 고령약사 대표로 나의 현재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3) 남구 전문가 친목회 <남우회>와 마라톤동호회 <달인약>
1978년 약국을 시작한 이래 나는 약국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약사회 일은 크든 작든 꾸준히 해 왔는데 2009년 현재의 다사랑약국으로 이전한 후 안정과 여유를 갖기 시작했고 2010년 남구청장으로 당선된 박우섭 구청장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남구같은 방위 명칭 좀 바꿨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고 이걸 박 구청장이 귀담아 들었던 것 같다. 주민참여기구를 출범시키려던 박 구청장이 수차례 약국을 찾아 왔고 협의를 거쳐 우선 전문가 친목회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정형서 후생의원장(현 문화원장), 김재용 변호사(문화원 부원장), 인천대 김영균 교수, 윤석애 화백, 천영기 교사 등 18명이 모여 2011년 <남우회>라는 전문가 친목회를 결성했다. 매달 모여 인천 남구의 현안과 관심사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2012년 남구 주민참여 자문위원회가 발족하면서 회원 다수가 이에 참여하였고 나는 남우회 회장을 하면서 자문위원장도 겸직하게 되었다. 당시 (지금도 좀 그렇지만) 전문가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구정을 가까이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많은 전문가들이 예산위원회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달인약(달리는 인천 약사들)은 마라톤을 통해 체력을 증진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인천 약사 모임이다. 2010년 결성돼 매주 달리기 모임을 갖고 있으며 인천국제마라톤, 송도국제마라톤, 춘천마라톤, 동아마라톤에도 대부분의 회원이 꾸준히 출전하고 있다.
이 모임에는 결성 직후 60대에 가입해 매일 밤 승학체육공원을 5km씩 달리며 꾸준히 참여해왔고 2015년까지 한국의 3대 마라톤대회인 춘천마라톤(조선일보), 동아마라톤(서울마라톤), 중앙마라톤(현 JTBC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여 모두 5시간 이내에 주파해 고교, 대학 동기들의 부러움을 샀다.
(4) 약사, 의사가 들려주는 임상강좌
2013년에는 구청의 제안으로 평생학습과와 협업으로 <의사와 약사가 들려주는 건강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내가 기획하고 강사를 섭외하여 주민 대상의 임상강좌를 실시하였다.
이 강좌는 학산학(미추홀구 역사), 노년 건강, 만성질환용약, 급성질환용약, 예방접종과 대장내시경(내과), 관절 질환(정형외과), 전립선 질환(비뇨기과), 백내장과 노안(안과), 치과 치료에 대하여 2명의 약사와 6명의 의사가 강의를 진행하였다.
이는 책자까지 발행한 주민 대상 최초의 임상약학 강좌로 알려지고 있다.
4. 요즘 이야기
취미활동 ; 한 때 테니스도 하고 마라톤과 등산도 정기적으로 하였으나 2020년 코로나팬데믹 시절 약국이 매우 바빴고 집사람 골절로 집안 일까지 하면서 무릎관절염이 와 운동은 체조 등 실내운동만 하고 있다.
중학교 때부터 좋아한 음악 듣기는 꾸준히 하고 있다. 이제는 氣가 달려서인지 글의 소재도 안 떠오르고 내용 정리도 잘 안 돼 글 쓰기는 2015년 이후로는 거의 절필한 상태이다.
일과 및 만나는 사람 ; 약국 일은 약국 개업 이후 현재 상태가 가장 보람있고 재미있게 열심히 하고 있으나 나이 때문에 체력의 한계를 느껴 근무약사 채용 등으로 근무 시간을 줄여나가거나 머지않아 폐업을 고려하고 있다. 폐업 후 주 2일 근무 정도의 부분 근무 업무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약국에 오는 환자 외에는 학교 친구들과 약사회 관련으로 약사들과 만나고는 있으나 이 역시 줄여나가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 ; 내 나름대로는 소속된 단체에서 회장, 총무 등 가능한 범위 내에서 주변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기는 하였으나 큰 일을 한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다행히 최근 그간 발표했던 글을 모아 평생문집 <횃불처럼 소금처럼>을 발간했고 약국약사를 위한 근육관절용 첩부제에 관한 강의록을 5년만에 완성하고 약국약사에 대한 강의에 나선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실을 얻은 것으로 평가하고 이 정도만으로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학산문화원에 나에 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된 것도 매우 소중하고 보람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의 계획 ; 별다른 계획이란 건 있지 않다. 남은 기간 건강을 유지하면서 약학 관련으로 내가 환자와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조금씩이라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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