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나의 어두운 이야기는 시작된다. 같은 건물에 서너개의 의원이 들어온다는 계약서까지 확인하고
꿈에 부풀어 시장 근처 신축건물 1층 상가 50평을, 10억 가까운 거액을 주고 구입해 약국을 이전했으나,
막상 입점한 것은 내과의원 하나 뿐이었다. 이 계약서란 게 불완전한 약속을 근거로 한 거짓 계약서인 줄을
몰랐던 게 화근이었다. 그래도 처음엔 6명이나 되는 직원을 채용해 시작했으나 내과가 영업 부진으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전을 해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고, 이후 조제량도 1일 20건 이내로 줄어들다 보니
모든 직원을 내보내고 집사람과 둘이서만 약국을 운영하게 되었다. 다른 의원을 유치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보았으나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참으로 무료하고 처절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기본 운영비에다 융자금에
대한 이자까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년 후, 가지고 있던 강화 땅을 처분하고 아파트도 팔아 작은
빌라를 구입해 옮겼다. 이사간 날, 우리 집은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약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곳은
임대를 주려고 하였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부푼 꿈은 사라지고 고통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5년간을 깜깜한 터널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들, 딸 모두 혼기가 꽉 차 결혼을 시켜야 했으나 파산 지경에
이른 지금, 그런 일은 감히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각자 직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결혼자금을
마련한다는 건 기대 난망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른 셋, 스물 아홉이 되도록 자식 둘 다 결혼 상대자를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감히 결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서 웃음은 사라졌다.
TV에서 아무리 재미있는 개그프로를 보아도 웃음이 나오지를 않았다. 마지막 3년간은 불면증으로 신경안정제를
달고 살았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도, 화장실에 다녀 오다가도,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 길가의 변호사나 법무사의 <파산, 이혼 전문> 광고를 보면,
불안감과 슬픔이 더욱 나를 엄습해 왔다.
평생 처음 겪는 시련에, 집사람은 심한 우울증에 걸렸고 저녁에 퇴근해 집에 오면 먼저 퇴근해서는
못 마시는 깡술을 앞에 놓고 마시고 있거나 술에 취해 쓰러져 있어 내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 집에 오는 길은 항상 조마조마했다. 늘 먹고 있는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로 두 번이나
음독 자살을 기도해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 입원하기도 했다. 헛소리 비슷한 말도 해대며 아내의 몸은 날로
여위어 갔다.
이대로 간다면 파산 밖에는 길이 없었다. 한 달에 몇 백만원씩 적자는 계속되었고 상가는 팔리기는 커녕,
임대도 안 들어 오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상가를 비워 놓고 약국을 옮기려 해도 자금이 바닥났으니
방법이 없었다.
터널 생활 5년이 꽉 찬 가을 어느 날, 드디어 동생인 딸이 결혼하고 싶다며 건장한 총각 하나를 집에 데려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딸 상견례 직후인 2008년 12월, 약국 이전 자금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이 되었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지금의 약국 자리를 바로 계약하게 되었다. 더 이상의 융자가 어려운 상황에서 은행 안내장을
보고 연락해 보니 8천만원의 신용융자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척척 맞아 들어갔다. 상가를 비워놓고
융자를 얻어 약국을 옮겼다. 이듬 해 6월,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비우고 나온 상가도 3개월만에 임자가 나타났다.
절망의 나락(奈落)에서 희망의 나라로 옮겨가는 순간이었다. 검은 파도처럼 밀려왔던 불행은 사라지고
‘봄의 소리 왈츠’처럼 경쾌하게 행복이 찾아 왔다. 대학 졸업 후 생활전선에 나서면서, 막내아들인데도 집안을
통째로 책임지고 살았지만 그 동안 입학시험도, 직장도, 약국도 모두 탄탄대로였다. 평생 처음 겪어본 위기였다.
사위가 복덩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기나긴 눈물로 눈두덩이는 그대로 부어 있었다. 한동안 이뇨제를 먹어 보았지만 부기는 빠지지 않았다.
딸 결혼식 날, 부어 있는 내 눈을 보고 후배가 울었냐고 물었다. 그 날, 난 울지 않았다. 마라톤을 하면 땀을
흘리면서 부기도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극한 스포츠인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힘은 약해도 도전정신은 강하다. 한번 마음 먹으면 굳세게
그리고 꾸준히 밀어 붙인다. 승부 근성도 있다.
우울의 기운을 아직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던 2010년 봄부터, 술 먹는 날을 제외하고는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빠짐없이, 야간에 체육공원에서 5km 정도를, 시속 10km로 달렸다. 그 해 가을, 최초의 도전인
인천송도마라톤대회 10km에 출전했고, 이듬해 봄에는 인천국제마라톤 하프에 나갔다. 슬픔은 내게서 멀리
사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2012년 11월 출전한 춘천마라톤 42.195km 풀코스에서는, 전혀 걷지 않고
마지막 5km를 전력 질주해 4시간 52분의 준수한 기록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결승선이 있는 대회 아치를
통과했다. 삼악산의 울긋불긋한 단풍이 병풍처럼 드리운, 아름다운 의암호를 즐기며 달렸다. 대학 동기회에서는
'60대에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며 공로패를 만들어 주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였고
동기는 처참하였으나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체육공원엔 어두움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걷다가 내가 달리니 내 뒤를 따라 달리는
사람도 있다.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다. 이 시각, 남자들은 직장에서 귀가 중이거나 술집에서 한잔 기울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눈의 부기는 다 가라 앉았다. 근력, 심폐 기능이 좋아진 건 물론이고 잡티가 모두 없어져 피부도 고와지고
검었던 안색(顔色)이 밝아졌다. 불면증을 깨끗하게 거둬냈다. 거기다가, 비듬을 열심히 만들어내고 코와 이마를
수시로 닦아야 할 정도로 심했던 지루(脂漏)도 사라졌다. 수족냉증, 부정맥, 연변(軟便), 잇몸출혈도 자취를
감추었다. 0.7과 0.9로 나빠졌던 시력이, 한참 때와 비슷하게 양쪽 모두 1.2로 좋아졌다. 복부비만이 항상
문제였는데 뱃살도 많이 없어져 허리둘레가 5cm나 줄었다. 몸도 가볍고 제법 옷태가 난다. 무엇보다
발가락이 붙을 정도로, 밤낮없이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의 각질도 거의 사라졌다.
외모나 체력이 좋아지니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기고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잃어버린 5년을 뒤로 하고 이제는
의욕이 넘치고 아이디어가 마를 줄 모르고 샘솟는다. 표정도 좋아지고, 고객에게 친절하게 한마디라도
더 하게 되고, 환자에게 복약지도도 열심히 하다 보니 약국도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약사회 감사에다 새로이 동창회장과 구청 주민참여 모임에도 자문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거기다가
'일반약 편의점 판매' 문제로 무려 50편이나 되는 칼럼을 썼고 중앙일간지에도 실었다. 작년 봄에는
직업소개서에 저자로 참여했고 구청에서 주최하는 임상강좌 기획과 임상약학 강의까지 맡아 성공적으로 해냈다.
평생 처음 해보는 일들이다.
눈물 자욱을 지우려 시작한 마라톤이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하는 일마다 보람과 즐거움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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