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약국 잔혹사 (비상기에서 빙하기까지)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소리로 하루 종일 시끌벅적할 때도 있었고 절간처럼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분에 넘친 성공도 힘겨웠고 잘못된 선택은 나를 수렁으로 몰아 넣었다.
의약분업 전인 1987년, 지금은 사라진 현대타운 내에 위치한 부평 현대백화점이라는 데를 들어가게 되었다.
개점일부터 전 매장이 인파로 뒤덮일 지경이었고 1990년 신관 확장 재개점일에는 아예 약국 앞이 사람으로
메워져 영업을 할 수가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94년 8월 들어 전관이 현대백화점 직영 체제로
바뀌면서 2층에 있던 약국은 폐점을 하고 1층에 내 약국만 혼자 남게 되면서 신, 구관의 중앙에 있던 약국을
백화점 끝의 전망엘리베이터 옆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7월부터 추석까지 경인지역에는 유례없이
38도에 이르는, 100년만의 이상고온이 지속되었고 약국을 비롯해 모든 업종에 구정까지 호황이 계속되었다.
백화점, 그 중에서도 슈퍼마켓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데다 오픈 매장이라 밖은 늘 시끄럽고 핸드마이크로
떠들어대는 소리로 8평의 좁은 약국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근무약사랑 일반직원의 이직도 잦다 보니 심신은
지쳐왔고 40대 초반의 체력으로도 지탱하기에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이전 작업에다
신규 직원 채용까지 눈코뜰새 없는 나날이 지나갔다. 백화점 영업을 시작하는 아침 10시 반부터 저녁 8시까지
약국에는 손님이 끊이지를 않았고 오는 것이 지겨울 정도였다. 피로는 쌓여만 갔다. 더구나 직원 6명 중
한 사람이 말도 없이 그만두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드디어 9월 말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자 마자 소파에 앉은 채 곯아떨어져 일어나지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가족들이 지친 내 모습이 안타까워 나를 빼놓고 성묘를 가게 되었다. 빠짐없이 가던 설날과 추석 성묘를
거르기는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얻은 3일간의 추석 휴가는 집에서 끙끙 앓으며 보내야 했다.
이제부터는 늘 반(半)건강 상태의 연속이었다. 12월부터는 심한 오한으로 구정인 다음 해 2월까지
3개월간을 낮엔 근무, 밤엔 끙끙 앓기를 반복하며 지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하다.
그 사이 매출은 처음 입점했을 때의 다섯배까지 뛰어 올랐다.
그러다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가 발생하면서 경기가 크게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백화점이라는 데는 늘 리모델링을 구상하고 있어 항상 자리를 옮길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고 주변 소음, 업무, 직원 스트레스로 맥박이 100을 오르내리는 불안정한 몸상태가 지속되었다.
매주 월요일 휴무는 쎄일이라는 이름으로 건너 뛰기가 일쑤였다. 앉아서 쉴 시간은 하루에 10분 정도나 될까?
이듬 해인 1998년 5월 보름 날엔 약국을 마감하기 직전인 저녁 7시 경 목소리가 갑자기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30분도 안 돼 목이 심하게 잠겼고 집으로 퇴근해 밤 11시가 되니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를 않았다.
늘 피로에 쌓여 있기는 했지만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3일을 기다려 보았지만 목소리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후염이겠지 하고 약을 스스로 조제해 복용해
보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근처 이비인후과를 찾았지만 내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란다. 자고 나면 모기소리만도 못하게 목소리가 잠시 나오다가는 다시 사라진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아내는 나보다 더 겁이 났고 성화에 떠밀려 종합병원을 찾았다가 검사를 위해 바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후두 결핵, 성대 결절에 대한 검사까지 모두 마쳤지만 원인 불명이란다. 방법이 없었다.
3일만에 퇴원해서 다시 끙끙 앓기를 시작했다. 오한으로 이불을 덮고 있으면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근무약사가 있었지만 이틀에 하루 정도는 잠깐씩 약국에 출근해야 했다. 말이 안 되니 글로만 일처리를
하고는 돌아왔다.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이러기를 3개월 반이 지난 8월 말일, 나를 주치약사로 따르는 친구가 좋은 소고기를 사주겠으니 나오란다.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몸이 조금은 나은 것도 같아 여름인데도 옷을 잔뜩 끼어 입고 아내와
음식점으로 나갔다. 정말로 평생 처음 먹어보는, 맛있고 부드러운 고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한잔만
하란다. 그럴까? 한잔만 마셔 보았다. 세잔까지 마셨다. 내가 노래하기 좋아하는 걸 아는 그 친구가 이번엔
노래방엘 가잔다. 그러지 뭐. 노래하는 거 구경이나 하면서 기분이나 풀어볼까? 노래 한 곡만 해 보란다.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 노래를 하라니. 용기를 내어 노래방 기계를 따라 불러 보기 시작했다. 의외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신기할 데가! 세 곡을 불렀다. 다음 날부터 정상 출근을 시작했다.
목소리가 사라질 때도 순식간이었지만 되돌아 오는 과정도 너무나 극적이었다. 신경을 과다하게 쓰다 보니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성대가 무기력해진 것 같다. 기가 빠진다는 게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1년 전인 2003년으로 돌아가 정말로 깜깜했던 나의 암흑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의약분업 후 백화점을
나와 인천 구월동에서 근처에 소아과, 내과, 정형외과가 있는, 전용면적 50평이나 되는 큰 약국을
운영하다가 근처 주공아파트 재개발로 근처 의원이 모두 사라지면서 3년만에 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알아보니 집에서 가까운 주안동 신기시장 입구 좋은 위치에 신축상가가 있었다. 서너개의 의원과 계약이
성사됐다는 건물주의 말을 믿고 거액을 주고 상가를 구입해 약국을 이전했으나, 한 달이 지나서야 내과의원
하나만 개원하는데 그쳤다. 불완전한 약속을 근거로 한 거짓 계약서인 줄을 몰랐던 게 화근이었다.
건물주가 부도가 났으니 따질 수도 없었다. 그나마 내과마져 영업 부진으로 1년이 되자 이전을 해버리고야
말았다.
이거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매약도 덩달아 줄어들다 보니 6명에서 2명까지 줄였던
직원을 모두 내보내고 집사람과 둘이서만 약국을 운영하게 되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이 때 시작한
인터넷 바둑이 15급을 거쳐 지금은 3급에까지 올랐다. 다른 의원을 유치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보았으나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기본 운영비에다 융자금에 대한 이자까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고 자영업자의 경우 이럴 때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를 면제, 경감하거나 납부 연기를
해달라는 내용으로 국민연금공단, 건강보험공단에 끈질기게 건의를 하다가는 결국 이 문제로 KBS 1TV
‘시청자칼럼’ 프로에까지 출연하기도 했다.
3년 후에는 백화점 때 구입했던 강화 땅을 처분하고 아파트도 팔아 작은 빌라를 구입해 옮겼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에 가족 모두가 심한 우울상태에 빠지고야 말았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고 우리 집에서
웃음은 사라졌다. 불면증으로 신경안정제를 달고 살았다. 수시로 눈가에 눈물이 맺히다 보니 눈두덩은
늘 부어 있었다. 자식들 결혼시키는 것마져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한 달에 몇 백만원씩 적자는 계속되었고
상가는 팔리기는 커녕, 임대도 안 들어오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상가를 비워 놓고 약국을 옮기려 해도
자금이 바닥났으니 방법이 없었다.
참혹했던 빙하기 5년이 지난 2008년 가을 어느 날, 딸이 결혼 의사를 밝혔다. 아무리 찾아봐도 더 이상의
융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얘기를 듣자 마자 혹시나 하고 은행 안내장을 보고 연락해보니 8천만원의
신용융자가 가능하다는 낭보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약국 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상견례 직후인 12월,
집에서 걸어서 다닐만한 거리인 학익사거리에 지금의 자리가 나와 있었다. 순식간에 약국 자리와 약국
이전 자금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이 되었고 바로 계약을 하게 되었다. 상가를 비워놓고 약국을 옮겼다.
비우고 나온 상가도 3개월 후에 임자가 나타났다. 결혼식도 곧 무사히 치뤘다. 모든 것이 척척 맞아 들어갔다.
정말로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바닥에서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힘겹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희망적이었다.
웃음도 찾았고 활기도 생겼다. 모든 것이 정상을 찾아갔고 집사람의 우울증도 나날이 좋아졌다.
하늘을 나르는 비상기가 있었는가 하면 차마 살아있다고 보기가 어려웠던 빙하기도 있었다. 그 시절 내내
내 생활은 거의 없었다. 집과 약국만이 있었고 몸과 마음은 찌들어 있었다. 나의 4, 50대는 그렇게 허망하게
지나갔다.
2009년 1월 지금의 약국으로 옮기면서 약국도 적당히 바쁘고 늦게나마 마라톤에다 음악 듣기 등 취미생활이랑
글쓰기도 하고 약사회, 동창회에다 동호회, 지역사회 활동까지 마음껏 하면서 돈 욕심을 버리고 60대를 철저히
즐기며 살고 있다. 이제야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다고나 할까?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지내고 있는 지금이
나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