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한라산 登頂記 (약사공론)

흑파 2013. 6. 13. 17:06

         한라산에 오른 마라토너 약사들과 가족

 

 

 예보대로 5월 25일 서울의 하늘은 맑았다. <달리는 인천 약사들>(달인약)회원 15명과 가족을 포함

32명을 태운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사뿐히 솟아 올랐다.

금방 서해가 보이고 주변에 아름다운 섬들이 즐비하다. 인천 앞바다에 이렇게 섬이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인천 토박이로 인천에서만 50여년을 살았는데도 허구한 날 집하고 약국만 왔다 갔다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15년만에 비행기에 오른 나는 남다른 설레임에 들떠 있었다.

오후 4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정확히 1시간 10분만에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40년 전 수학여행 때는 목포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12시간이나 걸려 제주항에 도착해 다시 1박을 하고서야 한라산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녁 7시가 되어 용두암과 비슷한 기암괴석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애월 바닷가 횟집에서 자연산 회에 술 한잔씩을 곁들여 우렁찬 건배로 흥겨운 전야제를 시작했다.

달인약 대표 꽃미남인 김성엽약사의 내자(內者) 유미라약사는 술을 전혀 못하는 모양인데 분위기에다

자신도 조금은 일탈을 하고 싶어서인지 내가 즐겨 마시는 백세주 반잔을 받아 마셨다. 늘 그렇지만 여행에서

새로운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관광지를 보는 것 못지 않은 즐거움이다. 유약사는 완전 리트머스시험지

그 자체였다. 술이 산성이던가?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그스레해진 모습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밤 10시 반이나 돼서 애월해변로 펜션에 도착했는데 모두들 아까운 이 밤을 즐기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총무를 맡고 있는 이관석약사와 부총무인 박찬수약사가 바베큐를 준비했다. 홍염미약사의 부군인

김형수박사는 며칠 전 완도전복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해 바쁜 가운데도 완도에서 전복을 싸 들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11시부터 시작된 야외 파티는 새벽 1시 반이나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인생사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렇게 남겨진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술이 과해서인지 남자들은 침대가 아니라 바닥과 소파에서 입은 채로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보니 펜션 옆 밭에 네모로 낮은 돌담을 쌓은 묘지가 보인다. 3시간 반 밖에 못 자고도 달인약의

창립자 박주돈약사와 달인약의 샛별로 떠오른 금년도 챔피언 양승철약사는 울트라마라토너답게 새벽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고 있다.

드디어 한국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구름도 안 보이고 적당히 더운 게 날씨가

아주 좋았다. 고산 등산에선 날씨가 매우 중요하니까.

아침 7시에 출발해 1시간만에 해발 750m인 성판악에서 버스를 내려 등산을 시작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해 시원하다. 중간에 보니 제주시에서 운영한다는 조랑말 목장이 보인다. 초딩 5명, 중딩 1명에

대학을 졸업한 박주돈약사의 딸 진희양까지 28명이 산행을 시작했다. 제주에는 3무(無)가 있는데

그게 바로 도둑, 거지, 대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인심이 좋고 같이 어울려 사는 고을, 다시 말하면

천국이라는 말이다. 산책로처럼 길이 잘 닦여 있다. 주변에서는 이 곳을 주름잡고 있는 까마귀 소리가

요란하다. 까마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 하면 어느 틈에 날아가 버리고 만다. 결국 까마귀 배경은

포기했다. 멀미로 기운을 차리지 못하던 박영미약사가 이제 잘도 따라 오른다.

속밭대피소에 9시 40분에 도착해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시 오름 길로 나섰다. 마라톤할 때 자기는 폼만

멋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문기주약사가 시작한지 1년 된 아들의 권투 동영상을 보여주며 따라온,

잘 생긴 초딩아들 자랑을 시작한다. 역시 자식 자랑은 즐겁다. 홍염미약사 가족 등 6명은 등산로 옆길로

4백m 거리에 있는 또 다른 분화구인 사라오름까지 다녀왔다. 사라오름 입구부터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멀쩡하던 박영미약사가 지쳤는지 쳐지기 시작하고 이관석약사는 길 가에 눕기도 하며 피곤한

기색을 보인다. 11시가 되어서야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했다. 백록담까지는 2.3km가 남았다. 준비한

점심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하늘을 보니 회색구름이 날라 다니고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한다.

도시락 반찬통이 날아가고 모자도 날아가 모두 허겁지겁 먹기에 바쁘다.

1700m 지점부터는 본격적으로 강풍이 불기 시작해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하다. 바람막이 점퍼를

꺼내 입었다. 여기부터 길 주변에 강풍에 뽑히거나 부러진 나무들이 나타나고 산은 거의 산죽(조릿대)만이

자리를 잡고 있고 구상나무 시신들이 즐비하다. 5월 하순인 지금도 진달래가 피어 있다.

1800m 고지에 오르니 눈 주위로 구름이 바람처럼 지나고 몸이 흔들릴 정도(초속 20m)의 강풍이 불어 오고.

여기서 점퍼를 하나 더 걸치고 보니 사람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진다. 1900m에 이르니 나무는 모습을 감추고

5cm정도 되는 풀만 앙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는 강풍이 쉴새없이 불어와 서있기가 힘들어 바람을 피해 몸을 바위나 구조물 뒤에 숨기거나

움추려야 한다. 거기다가 구름이 주변을 뒤엎어 춥기는 하고 그야말로 정신이 없다. 몸이 날아갈 것 같다.

백록담 밑부분은 끊임없는 구름에 가려 볼 수가 없는데 구름이 이동하면서 1분 정도만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물이 바닥에만 조금 깔려 있다. 얼른 눈에 담아보고 카메라에도 담는다. 개인, 단체 증명사진 얼른

찍고. 성판악 출발 5시간만인 오후 1시에 정상에 도착해 50분 후부터 하산을 시작했다. 완도전복의

김형수사장은 한라산 도전 네번만에 첫 등정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더구나 백록담 물을 볼 확률은

10% 정도 밖에 안 된다니 이번 등정은 큰 행운인 셈이다.

구린굴 굴빙고(굴 속 얼음저장고)를 지나 수많은 계단과 다리로 이어진 탐라계곡을, 혼자서 여유있게 MP3로

좋아하는 팝송을 들으며 내려왔다. 6시 관음사휴게소에 도착. 출발에서 10시간이 지났다. 총 18.3km에

달하는 대장정이다. 조금은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도 초딩, 중딩 모두들 얼굴엔 해냈다는 만족스런

모습들이다. 그리고는 목을 적시는 술 한잔이 시원하다.

40년 전에는 흙과 바위만으로 돼 있던 등산로가 계단으로 만들어지고 다듬어져 오르내리기엔 좋았지만

등산의 묘미는 그만큼 사라져 제대로 산에 한번 올라보고 싶은 이들에겐 좀 아쉬움이 남는다.

저녁 9시 반, 비행기에 오르니 잠이 쏟아진다. 갑자기 비행기가 요동친다. 잠결에도 ‘나는 소중하다.

이대로 사라질 수는 없다’고 외쳤다.

다음 날 한라산에는 강풍과 함께 1년치 강우량이라는 1천mm의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하루만 늦었다면

하고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