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 <약사가 말하는 약사> 중에서(최종 원본,하)
지역(개설)약국 약국장은 근무시간이 너무 길어
2000년 의약분업이 전면 실시되면서 고혈압치료제와 당뇨병치료제,PPI같은 위장약 등 모든 의약품을
취급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약의 전문가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의약분업 후 눈에 띄게 좋아진 점이 약국약사에 대한 호칭이다.전에는 아저씨,아줌마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약국업무가 조제 위주로 되다 보니 복약지도같은 전문지식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근무자가 많은 대형약국이 종합병원 인근은 물론 동네마다 생기고 대기시간도 길어지다 보니 자연히 대부분
약사님,선생님 또는 국장님으로 불러 표면상의 위상은 상당히 좋아진 것으로 보인다.
종합병원 문전약국이나 의원이 한 건물에 집단 개업한 경우는 약국장 외에 근무약사가 한두명씩 같이
근무하고 처방전 입력을 전담하는 전산원 등 업무보조자도 비슷하게 있으나 동네약국은 70% 이상이
약국장 약사 1인에 전산원 1명이 근무하는 구조로 돼 있다.
대부분의 의원이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진료하고 있어 이 시간은 주로 조제를 하고 있으나
그 이후에는 대부분 일반약 판매를 하고 있다.
근무약사는 대부분 9~10시간을 근무하나 약국은 대개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문을 열고 있어 진료가
끝난 후에는 약국장이 단독 근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약국장의 근무시간은 13시간 정도로 매우
과중하다.법정근로시간인 주 40시간의 배가 넘는 80시간에 이른다.약국장은 취미는 물론 가족과의 생활도
어렵고 친구 만나기도 힘들다.토요일도 거의 정상 근무하며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도 문을 여는 약국이
적지 않다.
의약분업 후에는 조제 외에 재고수량 파악,사용기한 확인,처방이 나오다가 끊어진 약(불용재고약) 처리 등
처방약 관리도 중요한 업무의 일부가 되었다.
내 약국은 정형외과 한군데 조제를 주로 해서 약 종류가 적지만 여러군데 처방을 받거나 종합병원
문전약국의 경우는 처방약이 수천종에 이르니 이 업무도 만만치가 않다.
나도 의약분업 직후 대형약국 시절에는 거의 3천종에 이른 적도 있으나 지금은 소형약국이라 약 5백종의
처방약이 있고 일반약도 점차 줄어 3백종 정도이다.박카스,레모나,살충제,염색약,일회용반창고,상처보호제
등 의약외품이 1백종 정도 있고 허리보호대 등 의료용품,방한대 등 위생용품,입술보호제 등 화장품,
식품드링크제 등 식품과 기타 품목 모두 합해 2백종 정도로 모두 1천 1백종 정도의 제품을 취급하고 있다.
30대 초반에 약국을 개설했을 때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시간을 내기도 어렵거니와 40대
후반부터 오기 시작한 원시로 책을 오래 보면 피로가 쉽게 찾아와 공부하기가 무척 어렵다.처방전을 보고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작은 글씨로 된 약품설명서 보기는 더욱 어렵다.
의약분업 전에는 직접조제가 가능해 약국장 개인의 능력에 따라 독자적인 경영이 가능하였으나 의약분업
후에는 처방전에 의한 조제가 주를 이루게 되다 보니 근처 병의원에서 발행하는 처방전 수에 따라 약국의
경영상태가 좌우되는 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근처 병의원이 폐업하거나 환자가 적어질 때는 약국도 심각한 경영 악화를 초래하거나 이전을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또한 기존 약국보다 병의원에 가까운 자리에 새로운 약국이
들어서거나 병의원과 같은 층에 약국을 개설해 1층약국과 경쟁을 하게 되는 경우도 드물게 볼 수 있다.
내 경우 현재는 같은 건물에 정형외과가 있고 여기서 발행되는 처방전 1일 70매 중 조제건수가 50건 정도로
그다지 많지 않고 일반약 판매도 그리 많지 않다.처방전이 모든 약국에 분산돼야 하는데 다른 약국에 가면
그 약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니 근처 약국으로만 환자가 몰리게 되었다.그래서 이젠 단골환자가 거의
사라졌다.
의약분업 후에는 자리 경쟁으로 병의원 인근 약국의 임대료가 크게 올라가고 권리금도 높게 형성되다 보니
약국을 개설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동네약국의 경우 임대보증금과 권리금,인테리어비,약품대,비품비 등을
합하면 약국 개설에 보통 2~3억원이 소요된다.아직 약국의 약사보조자제도가 확립돼 있지 않고 직원의
이직이 잦아 가족 근무자가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위험성이 있긴 하더라도 일단 자리만 잡으면
약국을 개설하는 것이 안정성이 있긴 하지만 능력,근무시간과 노동강도에 비해 적절한 대접을 받는지는
의문이 든다.개국약사는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돈을 쓸 시간이 없어서 돈이 남는 것 뿐이라는 말도
있다.
근무약사를 채용하는 1일 조제 1백 건 이상 약국의 경우는 근무약사 구인난과 과도한 급여,일반직원 등
각종 경비 외에 높은 임대료와 권리금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른바 약사약이라 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매약)의 판매는 지금도 약사의 능력에 크게 좌우된다.자세한
설명과 내국 환자를 이끌어 가는 능력에 따라 매출에 차이가 날 수 있으나 이것도 의약분업 이후에는 조제
환자 수에 비례하게 돼 조제건수가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에는 동반 하락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이 부분은 약사의 독자 영역이라서 실력 발휘가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보람도 있고 성취감이
높다고 하겠다.처방약 외의 일반의약품은 감기약,진통제,영양제(비타민),소염진통첩부제(파스) 등이
주류이고 의약분업 이후 현격히 하향 추세를 걸어 대부분의 동네약국에서 그 비중이 30% 이내이다.
개업,이전,의약분업 ... 파란만장한 40년
나는 개국약사 이미지가 좋아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개설(독립)약국 약사를 꿈꾸며 살았다.대학에 들어갈
즈음 제약학과가 생겼는데 제약이 전망이 더 좋을 것 같아 제약학과에 입학했으나 결국은 약국약사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처음엔 제약회사에 들어가 6년간 근무했으나 결혼하자마자 퇴직하고 빚을 얻어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개업을 했다.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때는 보증금에다 적당한 인테리어만 갖추면 얼마 안 되는
도매품목을 제외하고는 제약회사에서 대부분의 약품을 처음부터 신용으로 제공받았고 보통 권리금이
그리 높지 않고 시설비 정도여서 자금이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회사를 다니다가 하루 종일 약국 내에서만
지내다 보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운영은 처음부터 그런대로 잘 돼,집도 사고 아이 둘을 나아 기르다가
서울 구로구 오류동을 거쳐 고향인 인천으로 와서 서구 신현동 아파트단지 내로 갔다가 부평구 부평동에서
백화점 구내약국을 운영했다.근무약사 1~2명에 일반 직원 3~4명 합해서 6~7명이 근무하는 소위
대형약국을 13년간 경영하였다.
약국이 일반매장에 오픈돼 있어서 접근성은 좋았지만 매우 시끄럽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요일은 항상 근무하고 월요일만 쉬는데 그것도 쎄일이다 뭐다 하면서 빼먹기가 일쑤였다.일요일에
아이들과 놀러 가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였다.백화점의 일반 직원은 돌아가면서 근무하면 되나 나는 물론
약국 직원들은 쉬지를 못하고 하루 종일 쉴새없이 돌아가다 보니 심지어 손님이 약국을 향해서 오면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과로로 3개월간 목소리가 안 나와 입원한 적도 있다.근무가 거의 끝나갈 저녁 7시 쯤 갑자기 목소리가
안 나오기 시작했다.불과 30분 정도 밖에 안 되는 순식간의 일이었다.병원에 입원해 결핵 검사 등 각종
검사를 받아 봤으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내가 보기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가 원인이었다.풍선에
산소를 과다 주입해 풍선이 터진 꼴이었다.오한이 함께 밀려왔다.그 동안 약국에는 잠깐만 나가 중요한
사항만 지시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고 있으면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하루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술이나 한잔 하지”
“목소리도 안 나오는데 술은 무슨 술?”
“그게 아니고 맛있는 고기 사 줄테니까 군말 말고 나와”
“알았어”
옷을 두툼하게 입고 아내와 둘이서 나가니 그도 부인과 함께 나와 있었다.
그 친구에게는 내가 이를테면 주치약사였다.그의 가족에게 건강에 대한 문제가 생기면 그는 모든 것을 나와
상의하고 의지하였다.정말로 평생 처음 먹어 보는 맛있는 소고기였다.
“술 한잔 하지”
그 친구가 술을 권했다.평소에 술을 즐기던 터라 술을 앞에 두고 보니 그 와중에도 입맛이 땡겼다.
“그럼 한잔만 마셔 볼까?”
마지 못해 한잔을 들이켰다.
“세잔은 마셔야지”
“좋아.더 마셔 보지 뭐”
“노래방 가서 노래 한번 해 볼까?”
노래하기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 그 친구가 나를 유혹하였다.
“노래는 무슨 노래.그냥 구경만 할께”
그리고는 노래방엘 따라갔다.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친다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
“노래 한 곡 하지”
“글쎄,한곡만 불러볼까?”
목소리는 예상 외로 잘 뻗어 나왔다.신기했다.
“세 곡은 해야지”
그래서 세 곡을 무난히 해 치웠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부터 약국에 정상 출근했다.
약국 근무를 겨우 끝내고 집에 가서는 끙끙 앓기를 8월부터 구정 때까지 6개월간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 때는 8월이 지나고도 인천 지역 온도가 추석 때까지 38도를 이어지는 혹서 날씨가 계속되는 가운데
약국 경기가 최고의 호황을 맞고 있는데다가 근무약사가 8월에 갑자기 그만둔 후 새로 채용을 못 해 몸을
엄청나게 혹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지금 생각해도 그 때 상황은 끔찍하였다.그 당시 동선은 오로지
약국과 집 뿐이었다.
내 평생 명절에 성묘를 하지 못한 것은 그 때가 유일하였다.추석 때 차례를 지내고는 내가 소파에 앉아서는
그대로 골아 떨어져 일어나지를 못 해 가족들이 차마 깨우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나 경영면에서 내 약국인생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1999년 의약분업은 다가오는데 백화점에서는 슈퍼마켓이 있는 1층에서,통행이 가장
적어 매출에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지하층의 가전제품 매장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이런 일은
백화점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거기다가 백화점 구내에는 처방전을 발행할 의료기관이 전무해 의약분업
이후에는 일반약 판매만으로 약국을 운영해야 하는데 백화점이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 아파트
주민이 주고객인 상황에서 접근성도 좋지 못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역사적인 의약분업이 시작되다
의약분업이 시작된 2000년 남동구 구월동 50평짜리 대형약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약사의 직접 조제와 의사의 직접 투약이 모두 금지되고, 의사는 진료와 처방을,약사는 조제와 복약 지도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이는 약국과 병의원 양쪽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특히 약국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모든 약사들이 그러했듯이 완전의약분업을 시작하면서 나도 엄청나게 많은 고생을 했다.전엔 보지도
못하던 수많은 치료제에 대한 공부를 석달간 약사회에 매일 밤 모여 12시 넘어까지 해야 했고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익히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환자 대기석을 늘리느라 인테리어도
바꾸고 근처 의원 여섯군데에서 처방약 목록을 받아 수천종이나 되는 약을 주문하고 진열하고 이름과 낯을
익히는 작업으로 막바지에는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하기도 했다.
이 곳은 접근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면적이 넓고 근처에 소아과와 내과,정형외과가 있어 그런대로
경영은 수월할 것 같았다.거창하게 개업식도 갖고 시작한 약국은 매약도 상당한 수준이고 처방이 하루에
180건 정도나 나와 약사 2~3인,처방전을 입력하는 전산원 3~4명 등 6~7명이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 처리를 하며 지냈다.
이 시기에 많은 직원을 거느리면서 직원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다.
근무 중 한 전산직원이 사라져 찾아 보니 창고에 쭈그리고 앉아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다른 날은 그 직원이
일을 하다가 갑자기 약국 밖으로 튀어 나가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전화를 받으러 나갔었다는 것이다.
초창기라서 프로그램에도 문제가 많았고 모두 실수가 많은 편이기도 했지만 이 전산직원은 잘 몰라도 물어
보지도 않고 고혈압약 ‘코자’를 ‘코자플러스’로 입력하기도 하고 갱년기치료제 ‘리비알’은 1x1x28로
입력해야 하는데 28정이 1pack이니 1x1x1로 하는 등 틀리게 입력을 하는 일이 빈번해 결국은 퇴직 조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잘못을 하는 건 아닌지 지키고 있거나 나중에 검사를 해야 할 정도였으니까.도대체가
몰라도 묻지를 않는다.그러니 실수 연발이요 발전이 없다.질문 안 하는 건 대체로 여자들이 심한 편인
것 같다.
한 근무약사가 자신은 입냄새가 심하다며 조제실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하루 종일 마스크를 하고 근무해
기겁을 한 일도 있다.3년이 지나 차차 업무에도 익숙해져 편안해지는가 했더니 60m 떨어져 있는 내과,
정형외과 바로 옆에 새로운 약국이 들어서면서 경영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인원을 반으로 줄였다.그래도
매약 판매가 많아 여기까지는 견딜만 했다.하지만 가까이 있는 주공아파트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소아과마저 폐업하고 나니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이전을 결심하고 인천 남구 주안동 신기시장 근처 신축 건물에 점포를 구입해 문을 열었다.그러나 내 점포를
갖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같은 건물에 들어온 내과의원이 경영실패로 1년만에 떠나가는 바람에 평생 최초로
5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쓴 맛을 보고 인생의 나락에까지 떨어질 뻔하다가 4년 전 그 자리를 떠나 지금의
위치로 와 재기하게 되었다.이 기간은 내 인생의 가장 참혹했던 시기로 길이 길이 기억될 것이다.
두번 다 의원 이전이 결정적 이유였다.
지금은 임대 점포에서 아내와 단 둘이서 근무하고 있다.
개국약사에게만 주어진 축복
나는 3년 전부터 근무중 짬짬이 이렇게 글을 쓰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밤 8시
이후에는 매일 1~2시간씩 달리기 운동을 하고 약사동호회에 가입해 마라톤대회에도 출전하고 일요일에는
매월 고교동기생들과 서울 근교 등산도 한다.
평일 저녁 8시면 조제가 끝나니 친구도 만나고 모임에도 나간다.약사 중에 나는 약국업무 외에 약사회 회무,
동창회 일 등 외부 활동이 아주 많은 축에 속한다.재작년부터는 구청의 지역사랑 전문직모임 회장과 구정
자문위원장도 맡아 지역사회 일에도 참여하고 있다.금년부터는 구청에서 주최하는 건강강좌를 기획하여
의약품 강의도 시작했다.
독립(개설)약국장이란 게 근무시간이 길어 개인생활이 거의 없고 변화도 없어 다른 직종에 있는 친구들이
부러운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이 은퇴한 상태이나 내 경우는 아직도 약국
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어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글도 많이 쓰고 라디오에 팝송 신청하고 설악산 대청봉,공룡능선 무박2일 산행하고.동창회,약사회,구청 일,
안하는 게 없군.이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 완주하고.너무 역주행 하는 거 아냐?”
“그런가?”
“지금이 네 인생의 클라이맥스야?”
“그런가 보네”
“60대 그랜드슬램이 뭔 줄 알아?”
“설악산 공룡능선 타고 마라톤 풀코스 뛰고.이제 지리산 종주 하나만 남았네”
“그럼 그것도 한번 해 볼까?”
이제 딸,아들 모두 시집,장가 보냈으니 70세가 넘으면 절반만 근무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행을 하거나 전에
배우다가 중단한 기타 연주,15년 경력의 테니스 등 취미생활을 즐기며 살다가 80세에 이르면 완전 은퇴를
할까 생각 중이다.그러기 위해서는 건강이 뒷받침돼야 한다.그래서 자동차도 처분하고 밤마다 열심히
달리고 있다.
인생 1백세 시대를 맞아 늦은 나이까지 지역 주민들에게 약과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데 보람을 느끼며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은 우리 약국약사에게만 주어진 축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