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학
남구의 역사 속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알아야 한국사람이듯 남구 역사를 알아야 남구사람이다.
현재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돼 있는데 필수과목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박*섭구청장은 건설,토목보다는 인문,예술을 존중하는 분이라 지혜로운 시민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런 강좌가 마련되었다.
선출직은 건물같이 겉으로 보여주는 성과주의에 집착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에게 건강과 내면을 다지는 것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박청장은 작년에 전국 평생학습협의회 회장이 되어 전국적으로 평생학습을 주도하고 있다.
나는 역사전문가도 아니고 단지 조금 먼저 배운 사람으로,복습한다는 생각으로 두시간 동안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여기 인천 토박이 있으면 손 좀 들어 보세요'.토박이라 함은 3대 이상 인천에서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내 얘기 좀 하겠다.
나는 요즘 인천의 희귀인종이 된 인천 토박이이다.내가 태어난 계양구 작전동에 우리 친척이 20촌까지 모여
살았으니까 아마 300년 정도는 된 것 같다.
그런데도 어릴 때 나는 본관이 어디냐고 하면 인천 김씨라고 대답했다,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10년 전 쯤 뿌리가 알고 싶어 <김씨의 시조>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에 보면 김씨는 중국의 왕족이
많은 사람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이 금관가야라고 한다.이런 걸 보면
최근에 중국에서 온 사람 말고도 많은 사람이 몽고나 중국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부평(작전동)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으니 그래도
그 당시로는 성공한 사람 축에 드는 것 같다.
부평초등학교,인천중,제물포고,서울대 약대를 나왔다.
계양구에서 초등학교,중학교 때는 중구,동구에서 살았고 고등학교,대학교 때는 부평시장에서 살았다.
그리고는 나이 들어 옛 인천의 중심지인 이 곳 문학권에 살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인천의 중심지를 모두 거친
사람에 속한다고 봐야 하고 그런 점에서 인천의 역사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질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바쁘다 보니 나 자신부터 역사를 접할 기회가 너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어릴 때 60년대에도 어른들은 계산동을 갈 때 부평읍에 간다고 했다.원래의 부평은 계산동인데 일제 때 기차역이
생기면서 부평역이 생겼고 그 일대를 부평동이라 부르게 돼 지역명이 바뀌게 되었다.
내가 졸업한 후 계산동 계동국민학교를 부평초등학교로 개칭해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곳은 삼한시대(마한,진한,변한)에는 마한에 속했고 삼국시대 백제였고 고구려를 거쳐 신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지역에는 6.25전쟁 이후 고구려 사람들인 황해도,평안도 사람들이 많이 내려왔고 그 이후에는
백제사람이라 할 수 있는 충청도,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와 살고 있는 걸 보면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한번 인천에 정착한 사람들은 외지로 잘 안 나가는 걸 보면 인천이 살기 좋은 동네인 것 같다.서울로 많이 갔기는
하지만 나처럼 다시 돌아온 사람도 많고요.서울로 모여 들었다가 인천으로 온 사람들도 많다.
여기 역사를 적어 놓기는 했지만 이과 출신이라서 그런지 논리적인 글이나 말은 좀 하는데 이런 얘기는 잘 쓰지도
못하고 말은 더 못한다.전에 역사 성적은 좋았는데.ㅎㅎ
그래서 여기 적어 놓은 글을 한분씩 읽도록 하겠다.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는 분?
1. 인천의 지형과 문화권
인천의 지형은 산맥을 살펴볼 때 세가 약해서 그 줄기를 살피기는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桂陽山
(계양산, 395m)에서 뻗은 줄기가 鐵馬山(철마산, 225m), 朱雁山(주안산, 186m), 蘇萊山(소래산, 299m)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해안선과 평행되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로 인천의 생활 문화권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자연환경과 더불어 문학권과 계양권으로 각각 독립되어 발전해 왔다. 문학권은 文鶴山
(문학산, 233m)을 중심으로 문학동,선학동,관교동 등을 끼고 발달했고, 계양권은 계양산을 중심으로 계산동
지역이 발달되었다. 그러다 일제의 침략으로 제물포항이 열리면서 鷹峯山(응봉산 : 현재 자유공원 일대)을
중심으로 개항장(각국조계)이 생겨 상권이 형성되며 동인천 지역(개항권)이 발달하게 되었다.
주안산 ; 만월산으로 지금의 간석동에 있다.전에 인천부 주안면이 있었다.
2. 인천의 중심지인 문학문화권
인천의 진산으로 알려진 문학산은 南山(남산) 또는 鶴山(학산), 속칭 배꼽산이라고 불리는데, 인천의
진산답게 각종 유물 유적이 문학산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이미 기원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문학지석묘(현재 수봉공원에 있음)와 학익 지석묘(현재 인천시립박물관 앞마당에 있음)가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문학산 정상에는 비류백제설과 관련 있는 비류왕릉과 비류정, 봉화대가 있었다는 문학산성
(일명 彌鄒忽城-미추홀성), 백제우물(연수구 청학동, 청자 백자 조각이 다수 발견됨), 백제토기 산포지
(문학경기장), 백제 사신들이 중국행 배를 타기위해 마지막 작별을 나누던 삼호현(사모지고개), 임진왜란 때
김민선 부사가 왜적을 맞아 싸우다 과로로 순직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안관당터 등 많은 전설들이
산재해 있다. 또 옛 도읍지임을 알 수 있는 인천도호부청사 일부와 향교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
舊邑(구읍)으로서의 위용을 근근이 말해주는 듯하다.
진산(鎭山) ; 마을 뒤에 있는 산.마을을 지키는 산.
3. 지명 변화로 살펴본 인천의 특징
★미추홀(彌鄒忽) : 마한 54 소국 중 하나로 ‘미추홀국’이라 함.
BC 18년 백제 성립 후 ‘미추홀현’이라 함.
* 백제의 건국 신화
○ 온조 시조설 : 동명성왕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 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형은
비류로, 동생은 온조로 이름 지어졌다. 이후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비류와 온조는 왕위에 오르는
가장 유력한 순위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비류와 온조를 얻기 이전에 동명성왕과 북부여의 예씨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가 고구려에 찾아오자 동명성왕이 반겼다. 게다가 동명성왕은 첫째 아들인 유리를 태자로 임명하자,
비류와 온조 형제는 후일이 두려워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백제를 건국했고, 비류는 미추홀에 거주하다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자살했다는 설.
○ 비류 시조설 : 북부여의 왕인 해부루의 아들 우태는 소서노라고 불리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형 비류와 동생 온조이다. 그러나 우태가 죽자 졸본으로 망명한 주몽과
재혼하였다고 한다. 주몽은 소서노와 두 형제를 잘 보살펴 주었고, 소서노는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부여 예씨와
혼인하여 얻은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주몽의 마음은 유류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유류를 태자로 삼는다.
그러자 형인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말하기를, 대왕의 업적이 크고 우리를 잘 보살펴 주었으나, 이제는 나라가
유류의 손에 들어갔으나 다른 나라를 세우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대수와 패수를
건너 미추홀에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설.
* 미추홀이 백제의 근거지가 된 이유
○ 해상교통의 근거지
능허대(인천시 기념물 제8호) : 해안의 전망대
기녀 바위 :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을 사모하여 기녀가 떨어져 죽은 바위
대진나루(한나루) : 중국으로 떠나는 배의 출발지.
삼호현(사모지고개), 별리현
○ 전략물자인 소금 확보의 용이성
★매소홀(買召忽) : 고구려 장수왕의 한강유역 진출로 고구려 지명인 매소홀로 명칭이 바뀜.
★소성현(邵城縣) : 신라 경덕왕16년(757)에 지방 9개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꿈.
★경원군(慶源郡) : 고려 숙종 때 숙종의 모후(母后, 임금의 어머니)인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內鄕, 친가가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경원군으로 불림. ‘경원’은 왕 또는 왕비가 국가의 근원이 되므로 그들의 출신지를
경하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명칭임.
★인주(仁州) : 고려 인종 때 인종의 모후인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친정)이기 때문에 인주라 불림.
★경원부(慶源府) : 고려 공양왕 2년 경원부로 승격. 순종․선종․헌종․숙종․인종 5대 왕의 외향(외가)이며
문종,순종,선종,예종,인종 5대 왕비의 내향 즉 ‘어향(御鄕)’은 왕의 고향을 의미하지만, 7대에 걸쳐 인천이
왕실과 관련을 맺고 있어 ‘칠대어향’이라 불렸다.
★인주(仁州) : 조선 태조 때 ‘경원’은 새로운 왕조인 조선 왕과 왕비의 근원이 아니므로 ‘인주“로 복구.
★인천군(仁川郡) : 조선 태종13년(1413) 지방제도의 체제를 ‘주→부→군→현’으로 정비하며, 고려시대
‘지주사(知州事)’는 郡으로 하되 ‘州’자가 붙은 곳의 이름을 ‘山’이나 ‘川’으로 개정하여, ‘인천군’으로 개정됨.
처음으로 ‘인천’이라는 지명이 나옴. 2013년 올해가 인천이라는 지명이 붙은 600주년 기념인 해가 됨.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 세조 6년(1460)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외향을 기려 도호부로 승격.
★인천현(仁川縣) : 숙종 14년(1688) 여환의 역모에 연루된 곳이라고 인천현으로 강등됨. 10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다시 예전의 읍호로 복구시켜주기에 1698년 인천도호부로 복구됨.
Q. 지명 외워보기
마한․백제 ( ) → 고구려 장수왕 ( ) → 신라 경덕왕 ( ) → 고려 숙종 ( ) → 고려 인종 ( ) → 고려 공양왕 ( ) → 조선 태조 ( ) →조선 태종 ( ) --->세조( ) --->숙종 ( ) --->개항 초( ) --->대한민국 ( ) |
*가로명에 모두 들어가 있음.
미추홀,매소홀,소성현, 경원군 ,인주,경원부,인주,인천군,인천도호부,인천현,인천도호부,제물포(항구),인천시,
인천직할시,인천광역시.
가로명으로 본 인천 역사를 알아 보기로 하겠다.
매소홀로 ; 용현5동 낙섬사거리(신용보증기금)-학산사거리-문학지하차도-구월동 전재울삼 거리
한나루로 ; 도화동 제일시장 삼거리 - 용일사거리 - 학산사거리
경원대로 ; 부평동 굴다리사거리-부평역- 십정사거리-석바위사거리-송도동 외암도사거리
인주대로 ; 용현동 능안삼거리-신기사거리-길병원사거리-장수동 인천대공원 남쪽 장승백이사거리-장수동
인천대공원 후문 옆 치야고개삼거리
미추홀대로 ; 주안역-신기시장사거리-문학터널-청학사거리-동춘지하차도
소성로 ; 용현동 비룡삼거리-학익사거리-문학 구도로-문학동 문학궁
부천은 ‘부평’의 ‘부’와 인천‘의 ’천‘을 합해 만든 이름.
요약하면 미추홀,매소홀,소성현을 거쳐 고려 때 경원군,인주라고 불렀다.
7대에 걸쳐 80년간 왕비를 배출하면서 정권을 장악해 ‘왕의 고향’이라는 ‘어향’이라 불렀고 ‘경원부’
(직할시?)로 승격시켰다.
올해는 태종 때인 1413년 인천이라는 이름을 지은지 6백년 되는해.고양에서는 定名 6백주년 행사를 하고
있는데 인천은 재정문제로 못하고 있어 아쉬움.
도호부는 현재의 市와 같이 도시지역이라는 의미임.계산동 지역에는 부평도호부가 있었음.부평도 도호부건물
일부와 향교가 남아 있음.
4. 남구의 문화유산
1) 학익 ,문학 지석묘(고인돌)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천에 지석묘가 산재해 있다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이미 이 지역에 부족세력이 형성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렇게 볼 때 인천의 역사는 우리 인천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백제에서 거슬러 올라가도 한참을 가야 될 것이다.
채집경제 생활을 하던 시절, 사람들은 물가 특히 해안가를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바다는 훌륭한 어장이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초기까지만 해도 주안역 북쪽은 염전지대였으며 학익동에 있는 한불화학 동양화학
주변은 모두 펄이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문학산 일대는 우리 선인들의 생활터전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문학산등성이로 아침 해가 솟기 시작하면 그들은 연경산을 넘어 바닷가로 나갔다. 그리고 전날 수로에
쳐놓은 나무 발에 걸린 고기들을 거두었다. 펄에서는 조개도 캐고 낚시도 했을 것이다. 많은 수확이 있던 날에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도 했을 것이다. 이런 생활을 하며 살다가 우두머리가 죽으면 그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커다란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지석묘1)인 것이다.
학익 지석묘는 지금 인천구치소 자리(전에는 소년형무소였음)에서 일제 때 발굴되었다. 仁川府史(인천부사)에
의하면 발굴 당시에 5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소년형무소를 지으면서 4기는 없애버리고 1971년 교도소 확장
공사 시 1기는 자유공원으로 옮겼다가 현재 송도에 있는 인천시립박물관 앞에 다시 옮겨 놓았다. 이 중 발굴된
지석묘는 3기로 모두 북방형이었으며 石廓(석곽) 내부에서 토기의 파편과 돌화살촉 파편 돌칼 숫돌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전시될
날을 기다려 본다.
학익지석묘 - 북방식지석묘
문학 지석묘는 학익동 신동아아파트에서 문학으로 넘어가는 도천현 남쪽 밭 가운데 있었는데, 蓋石(개석 :
덮개돌)만 발견되었다. 개석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선지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산 주변에서 돌도끼 4개 돌칼 돌화살촉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일정한 세력을 이룬 무리가
살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현재 수봉공원의 반공회관 앞 능선에 놓여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선조들의 무덤인 이 지석묘가 제자리에서 이동되어 다른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무덤을 옮겨 놓고 감상한다는 것이 왠지 꺼림칙하다. 다른 곳에는 모형을 만들어 놓고 원형은 제자리에 놓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후손들이 어느 곳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를 상상할 수 있으며, 주변과 어우러진 유적 유물을 통해
과거로의 여행을 보다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연륜의 이끼가 켜켜이 내려앉은 역사물을 바라보면서 선인들과
묵언의 대화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살아 있게 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별도 멘트
선사시대부터 학익동지역에 부족이 형성되어 있었다.
주안역 북쪽은 지금 공단지역을 포함해 60년대에만 해도 모두 염전이었다.초등학교 때 동네 형을 따라
염전에서 수영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중고등학교 교내마라톤대회 때 동양화학 앞까지 뛴 기억이 있다.
2) 인천도호부청사(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1호)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이곳을 관교동이라 하는데, 옛 인천부의 중심지가 된다. 동명의 유래는 관청이
있다는 ‘관’자와 향교의 ‘교’자가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만큼 힘의 중심지가 된다는 뜻이다.
仁川府邑誌(인천부읍지)에 의하면 당초에 인천도호부청사에는 객사 20칸, 내외삼문 3칸씩, 동헌 15칸,
내동헌 33칸, 공수 6칸, 사령청 9칸, 향청 13칸, 군관청 7칸, 훈무당 6칸, 질청 27칸, 옥사 4칸, 별무사청 42칸,
창고 6동, 좌기청 5칸, 수미고 4칸, 군기고 5칸 등이 있었으며, 군기청 옆에는 인공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
知小亭(지소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매우 큰 규모의 도호부청사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객사 일부와 동헌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원래의 위치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이 건물 중 객사는 당초 20칸이었으나 거의 없어지고
현재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2) 양식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 기둥을 가진 집이다.
동헌은 원래 문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문학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은 것으로,
앞면 6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얼마 전까지 校舍(교사)의 일부로 쓰여 왔다. 이외의 군관청은 해방 전
경찰파출소로 쓰다가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내동헌은 1955년까지 인천시 문학출장소로 쓰다가 새로 출장소가 마련됨에 따라 교정을 확장하기 위하여
헐어버렸다고 한다. 문화재의 관리에 대한 무지에 그저 놀랄 뿐이다.
맞배지붕(객사)
팔작지붕(동헌)
그러나 현재의 시청이나 마찬가지 역할을 했던 도호부청사가 이렇게 왜소해진 까닭은 우리의
문화에 대한 무지도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철퇴를 맞은 결과이기도 하다.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은
전국 곳곳에서 도호부 청사를 허물고 그곳에다 학교를 세워 식민교육의 장으로 행정관청을
전락시켰던 것이다.
힘의 구심점이던 행정관청을 헐어 버리고 그곳에서 그들의 식민화 교육을 펼친 일제의 치밀하고도
잔혹한 계획에 다시
한 번 치를 떤다. 현재 물밀듯이 밀려드는 일본 저질문화의 보급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현재 도호부청사는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복원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항상 북적거린다. 주말이면 문화체험 등
공연이 열려
여가의 장이 활짝 펼쳐지지만 원래의 도호부청사 터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지울 수가 없다.
별도 멘트
세조 때 건축했다.
도호부는 지금의 市.1천호가 기준인데 세조 妃의 친정이라 기준 미달인데도 승격시켰다.
원래는 문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부평도호부도 마찬가지이다.
도호부에 계동국민학교를 만들었다.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암수 은행나무도 있다.구렁이가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
학교 다닐 때 소풍 때마다 비가 왔다.
3) 관교동 은행나무
문학초등학교 교정 뒤편에는 나이가 500살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은행나무가 마치 굵은 가지로 하늘을
떠받치듯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는데, 이 나무에는 아기장수 설화가 얽혀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이 40이 되도 아기가 없던 정씨 내외는 산천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아들을 낳게 되었다. 아이는 점점
자라면서 이목구비가 번듯하고 피부도 백옥처럼 흰 귀공자로 바뀌어 갔으며 몸집이 하도 커서 마을 사람들은
장래 대장감이 태어났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정씨 부인이 탁발승에게 시주를 하려고 한 즉, 그 스님은
부인 등에 업힌 아이에 눈이 미치자 한동안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춘 채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정씨 부인이
까닭을 묻자 스님은 대답하기를 거절하다 마침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의 관상을 보니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은 틀림없지만 눈에 살기가 뻗쳐 많은 사람을 해치거나 역적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소문이 결국 마을에 나돌아 사람들은 뒷날 닥칠 재앙이 두려워 아이를 해칠 음모를
꾸미기도 하고 아이를 죽이라고 강요도 하게 되었다. 정씨 부부는 궁리 끝에 산신령이 아이를 거두어 줄는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아이를 산에다 버리게 되었다. 아이를 버리고 돌아서자 갑자기 서쪽 하늘에 번개가 치고 천지를
흔들만한 굉음이 들렸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었을 때, 어느 날 석양 무렵 갑자기 하늘이 붉게 물들더니 아이를 버려둔 그 자리에서
용마가 솟아나 세 번 크게 울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은행나무 싹이 나와 무럭무럭 자랐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정씨의 아들이 은행나무로 살아난 것이라 믿고 봄가을에 날을 가려 제사를 지내면서 마을의
평온과 풍년이 들기를 정성껏 기원하였다. 은행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정성에 감복했는지 은행잎이 하룻밤 새에
떨어지면 이듬해 풍년이 들고, 잎이 떨어지는 기간이 길면 가뭄이나 홍수가 드는 凶豊(흉풍) 여부를 미리 알려
주었다.
또 잎이 맨 윗가지부터 떨어지는 해에는 높은 지대의 논에서부터 모를 심고, 낮은 가지부터 떨어질 때는 낮은
논에서부터 모를 내면 풍년이 들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은행잎이 떨어지는 상태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한다.
관교동 은행나무
이 나무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얽혀 있는데 경술년 국치에 관한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기 3년
전부터 이 은행나무와 도호부청사가 있던 주위에 구렁이가 몰려들었는데, 그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그 많던 구렁이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이
나라를 빼앗길 전조였던 것으로 깨닫고 이로부터 이 나무를 더욱 신성하게 여겼으며 개인의 소원성취를 위해
치성을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별도 멘트
문학초등학교가 있는 도호부 터도 관아와 향교가 있다고 해서 전에는 관교동이었다.
龍馬;용같이 생겼다는 상상의 말
4) 인천향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문학초등학교를 나와 좌측으로 400여m쯤 가면 유림(儒林)의 도장이었으며 조선시대 인천 교육의 산실인
인천 향교가 국난과 민족 수난을 같이 하면서 5차례의 중수 끝에 약 550년 전의 옛 모습을 보여주듯 의연히
자리하고 있다.
사적자료가 분명치 않아 건립연대를 알 수 없으나 사가들은 崔恒(최항)의 重修記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조가 재위하던 기간(1455~1468)에 중수된 것으로 보고 있다.
향교는 공자 이하 儒賢(유현 : 유교에 정통하고 행적이 바른 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와
학생들을 모아 강습하는
학교가 병설되어 있으며, 그 기능에 따라서 필요한 건물들이 祭享空間(제향공간)과 講學空間
(강학공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
인천 향교에는 제향공간으로 본전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를 두고, 강학공간으로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고 있으며, 그밖에 향교 입구에 홍살문과 도호부청사 앞에 있던 것을 옮겼다는
10여 개의 송덕비가 있다.
대성전은 맞배지붕에 한식골기와 형태로 좌우에 방풍판이 있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지었는데, 안에는
문성왕(공자)의 위패를 비롯해 중국의 4聖(맹자, 증자, 언자, 자사)과 우리나라 유학의 18賢(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의 위패가 모셔지고 있다. 동무와 서무에는 원래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9현씩 나누어 모셨는데 8․15
해방 후에 대성전으로 옮겼다고 한다.
명륜당은 팔작지붕에 한식골기와의 형태이며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향교의 본래 기능인 공자의
사상을 받들어 유생들에게 강학을 하는 교육장이며,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숙식과 독서를
하던 곳이다.
명륜당
인천향교 홍살문
1955년과 1964년의 두 차례 중수에 이어 1976년에는 삼문과 대성전 명륜당을 보수하였고 1979년에는 다시
시에서 4천만 원을 들여 대성전을 중수하고 1980년에는 2천만 원을 들여 명륜당을 중수하였는데 홍살문에서
명륜당,동재,서재,동무,서무,대성전까지의 건물배치는 물론 사용한 재료까지도 가급적 종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풍스러운 멋을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명륜당 안에서 문학산 산세를 보고
있자면 앞이 툭 트인 것 같아 시원스런 것이 글을 읽고 사색하기에는 최적지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선조들의
풍수지리에 찬사를 보낸다. 자연과 어우러진 건물의 배치, 건축의 양식에서 그들의 숨결을 듣노라면 현대
과학문명이 만들어 냈다는 성냥곽 같은 우리의 아파트식 건물은 사람의 숨결이 아닌 기계의 금속성 소음만을
생각케 한다.
현재 인천 고적권 복원 계획에 따라 인천 시청에서는 향교 앞에 도호부청사를 복원했는데, 인천 교육의
산실이었던 향교의 앞을 가로막고 행정관청을 짓는다는 발상은 행정 편의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공부하던 곳인 향교 앞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도 타고 다닐 수 없도록 下馬碑(하마비)를 세워
교육의 산실을 존중했다는데, 그 많은 땅 중에서 하필이면 향교 바로 앞마당에 도호부청사를 복원해야 하는 지
이해가 안 된다. 혹시 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5) 학산서원(鶴山書院)
학산서원지는 문학산과 연경산 샛길인 사모지고개로 오르는 중간 길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1949년부터 본격적인 학술조사에서 ‘학산서원(鶴山書院)’이라 새겨진 와편이 발견되고 그 주변에서 재실과
강당 그리고 사당의 건물초석이 확인됐다.
그러나 도시의 확장과 함께 다시 유실, 이후 문학산 터널공사로 인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돼
인천시립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그 위치를 추적하여, 2004년 인천시 남구와 학산문화원이 표지석을 설립하여 지역에
비지정문화재를 보존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학산서원 터
학산서원 표지석
2009년부터 문학산지킴이 '도토리' 회원과 문학동 두리지역복지센터 직원 및 자원봉사자들이 그 터를 닦고
나무와 꽃을 심어 가꾸고 있으며, 집터에서 나온 돌들을 모아 돌담을 쌓고 있다. 벌써 5년째 접어들고 있는데
지극정성이 문학산을 오르는 등산객에게 사진에 찍혀 명소로 알려지고 있다. 빠른 시일 안에 사당이
복원되기를 기원해 본다.
학산서원은 숙종28년(1702) 이정빈 등이 정관재 이단상을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여 윤허하였고, 숙종34년
(1708) 건립되어 정일빈 등이 사액을 청해 사액서원(국가의 공인을 받아 서원명,현판과 노비·서적 등을
하사받았던 서원)이 되었다. 그러다 영조2년(1726)에 그의 아들 이희조를 추가 배향하게 되었다.
이단상은 1628년에 출생하여 1669년에 세상을 떠난 선비로 자는 유능, 호를 정관재라 하였는데
조선조의 명문이며 대문장가인 백주 이명한의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직을 거친 후
현종 때 외직을 희망하여
인천부사가 되었으나 6개월 만에 사직하고 양주에서 학문연구에 힘썼다. 뒤에 다시 벼슬에 나가
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하에 그의 아들인 이희조와 김창협, 김창흡, 임영 등의 쟁쟁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이희조(1655 1724)는 송시열 수제자의 한 사람이다. 건릉원 참봉이 되었다가 곧 사퇴한 후 여러 내직을 거쳐
숙종 20년(1694)에 인천부사를 지냈다. 그 후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나 노론과 소론 싸움에서
노론이 밀려난 신임사화(1721~22)로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이 유배당할 때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평안도 철산으로 옮겨지던 도중 정주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후진 교육에 힘쓰는 한편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鶴山書院 외에 평강의 山仰齊影堂(산앙제영당)에 제향되었다.
김창협이 지은 「仁民堂記(인민당기)」에 의하면, 이희조는 부친 이단상이 인천부사로 재직하다가 물러난
뒤 36년 만에 인천부사가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부임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나의 선친이 부사를 역임한
고장으로서 선친의 치적이 아직도 남아 있거늘 내가 정사에 능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죄를 짓게 된다면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 묘에 배알할 수 있으며 나의 노모를 안심케 하여 드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고을은
仁으로써 이름하였으니 나도 仁政을 목표로 하여 힘쓰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주야로 침식을 잊고 민생
구제책에 고심하여 賑貸(진대)의 업무를 직접 맡아 보아 吏屬(이속)들의 농간을 막음으로써 양식이 골고루
분배되어 춘궁기에도 유리걸식하거나 굶어죽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 또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民자를
표방하여 거처하는 청사를 ‘仁民堂’이라 이름 짓고 더욱 어진 정사를 펴기에 노력하였다. 이에 부민들의
찬양하는 소리가 이웃 마을뿐 아니라 서울까지 퍼졌다고 한다.
그래서 부민들은 그들의 공덕에 자그마한 보답이나마 하려고 학산서원을 세워 두 분을 봉사하고 그들의
유덕을 기렸다.
그 후 고종 2년(186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학산서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별도 멘트
향교는 공립학교이고 서원은 사립학교인데 서원은 납세와 병역을 기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돼 대원군 때
철폐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인천향교는 세조 때 중수했다.세조 이전 건축물이다.
낙향한 선비들이 제사와 교육을 겸한 서원을 설립했다.
학산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현판을 받은 사액서원이라 유적으로의 값어치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는데
복원은 커녕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10년 전 쯤 영주에 갔었는데 거기에도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서원이 있었는데 현판을 비롯한 건물이 잘
보존되고 있어 우리와 대비가 돼 부러웠다.
祭享;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를 높여 이르는 말
配享;잘 받들어 모시다
重修; 다시 손질하여 고치는 것
사모지고개
6) 사모지 고개(三呼峴)
학산서원터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의 고개 마루에 다다르는데 이곳이 여러 가지
전설이 얽혀 있는 사모지 고개(三呼峴, 三亥酒峴, 思慕峴, 師母峴)이다. 지금은 청학동으로 가는 도로를
내느라 문학산과 연경산의 비탈 흙을 깎아 메워 둥글번번한 마루턱이 되었으나 옛날에는 좁고 잘록한
고개였다고 전한다.
이 고개에 대한 전설 중 三呼峴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중국으로 가던 사신들은 육로나 해로를 택했는데, 해로를 택할 경우 서울에서 부평의 別離峴
(이별고개)을 거쳐 이 고개를 넘어 한나루(大津 : 지금은 매립하여 논으로 쓰다 아파트들이 지어져 있는데
송도역 앞 옥련동에 위치)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런데 그때 사신을 배웅하러 따라 나왔던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고 한다. 중국까지는 멀기도 했지만, 풍랑을 만나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서였다.
한편 사신들도 삼호현에 이르면 멀리 보이는 별리현에 그때까지 서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오랫동안의
이별을 마지막으로 안타까와했다. 그래서 사신 일행은 모두들 “잘 있거라. 그동안 잘 있거라. 다녀올께, 잘
있거라.”하며 이별의 아픈 소리를 했다고 한다.
별리현에 서있는 가족들을 향해 세 번 큰 소리로 외치면서 넘은 이 고개, 이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이
고개를 세 번 부르는 고개라 하여 三呼峴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7) 술이 나오는 바위(중바위)
[여지도서]에는 사모지 고개를 三亥酒峴이라 적고 있는데, 고개를 넘어 청학동쪽으로 15m 가량 내려가면
왼쪽 벼랑에 큰 바위가 있어, 이를 술이 나오는 바위(중바위) 라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바위
이 바위에는 지금도 뚜렷하게 움푹 파인 두 무릎 자국과 두 손자국 외에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고개를 넘어 다니며 수도하는 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 사모지고개
마루턱에 술이 고여 있는 바위가 있으니 매일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 술을 석잔 씩만 마시면 천지의 이치를
깨쳐 대사가 될 것이라 했다. 이튿날 스님은 실제 바위 속에 술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매일 석잔 씩 마시며
수도에 힘썼다.
그런데 어느 무더운 날 술 석 잔을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자 산신령의 당부도 듣지 않고 거푸 술을 마셔
거덜이 나고 말았다. 술에 취한 스님은 부아가 나서 바위를 두드렸더니 갑자기 靑天霹靂(청천벽력)이 나며
청학풀장 근처에 있던 흔들못이 흔들흔들 하더니 용마 한 필이 나와 히히힝 울며 하늘로 올라가고 스님은
벼락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청학동에 사는 어느 스님이 시주를 하러 학익동으로 매일 고개를 넘어 다녔는데, 어느 날 목이
말라 물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여쁜 색시가 술잔을 받쳐 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곱상한 모습의
색시는 스님에게 술 석 잔을 공손히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매일 그 장소에 가서 쉬기만 하면 색시는 술
석잔을 바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매우 무더운 여름날 갈증을 이기지 못한 스님은 색시에게
술 석잔을 받아 마시고도 성에 차지가 않자 한잔만 더 줄 수 없냐고 했다. 색시는 아무 말 없이 바위 뒤로
사라지고 다시는 술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은 색시가 사라진 바위에 무릎을 꿇고 바위를 머리로 받으며 “색시, 술 한 잔만 더 주오,
주오”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때 머리로 받은 자리에는 구멍이 생기고 무릎 자국과 손자국이
뚜렷이 새겨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일로 이 바위를 중바위라 불렀다 한다. 이 밖에도 청학동에 사는 가난한 어느 효자와 얽힌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해설
삼해주(三亥酒); 정월의 세 해일(亥日)에 담가 익힌 술의 하나. 정월 상해일(上亥日)에 찹쌀가루로 죽을 쑤어
식힌 다음 누룩가루와 밀가루를 섞어서 독에 넣고 중해일(中亥日)에 또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하해일
(下亥日)에 흰쌀을 쪄서 식힌 뒤 독에 넣고 익혀 버들가지가 날릴 때 마셨다는 술
8) 갑옷바위
갑옷바위는 사모지 고개를 넘어 중바위와 마주보는 길 오른편 연경산 비탈에 있다. 그 옆에는 무덤들이
있어 찾기가 쉽다. 얼른 보아 승용차를 비탈에 세워 둔 듯한 형상인데 자세히 바라보면 이 바위는 그리 크지
않으나 상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바위는 사방 둘레에 큰 금이 나 있어 흡사
뚜껑을 닫아 놓은 돌함의 모습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장수가 이 바위의 아랫부분에다 돌함을 파고 자기 갑옷과 투구를 감춘 다음 그
위에다 뚜껑바위를 덮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바위를 건드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은 문학산 꼭대기의 안관당 당지기가 이 바위를 깨뜨려 그 속에 무엇이 들었나 확인할 작정으로
뚜껑바위 아래쪽을 망치로 쳐서 깨뜨렸다고 한다. 그러자 정말 청천벽력이 치고 천지가 진동하여 당지기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갑옷바위의 아랫부분은 4분의 1 가량이
깨어진 채로 있다.
그런데 이 갑옷바위의 주변에는 커다란 돌들이 7~8개 정도 흩어져 있어 혹시 이곳이 지석묘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장수의 전설이 있어 돌을 건드리면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정도 크기의 돌들이 있을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한번 조사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갑옷바위
9) 문학산성
향교 앞에서 마주보이는 산이 문학산(233m)인데, 인천의 진산으로 鶴山 또는 南山이라고 부르며 속칭
배꼽산이라 한다. 이 산은 이미 기원전부터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한다. [輿地圖書(여지도서)] 인천도호부
고적조에는 ‘文鶴山上頗寬 乃彌鄒王古都也 有古城基址焉’이라 하여 문학산성을 미추왕(沸流)의 옛
도읍지라고 하였고, 안정복은 [東史綱目(동사강목)]에서 ‘今仁川 俗傳文鶴山上 有沸流城基城門川板
至今猶存 城內有沸流井 味淸洌云 勝覽不載可歎’이라 하여 속전하는 바로 문학산상에는 비류성의 터가 있고
성문의 비판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성내에는 비류정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문학산성은 내외 이중으로 된 성으로, 외성은 주위가 약 200m이고 내성은 토성으로 약 100m가 되는데
자연적 험지를 이용해 쌓은 것이므로 성벽의 높이가 5m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내 정상에는 흙으로
쌓아 올린 봉화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으며
동북면 성벽이 다소 남아 있을 뿐이다. 비교적 최근의 기록인 「전국유적목록」에는 ‘문학산성, 석성(石城),
미군기지’라고 기술해 1959년 이후에 산 위의 고적 소멸 사실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이런 까닭에
[여지도서][동사강목] 등 고서에 전하고 있듯 문학산성이 비류 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문학산은 인천의 주산일 뿐 아니라 이 산성도 일찍부터 축조되어 삼국시대 이래로 인천에 대한
산성의 역할을 담당하여 온 것만은 사실이다. 멀게는 비류가 도읍했던 곳이요, 임진왜란 때는 인천부사
김민선이 낡은 성을 다시 쌓고 사민(士民)을 거느리고 여러 번 왜병을 무찔렀던 요새이며, 조선 말 이양선의
내침 등으로 나라의 운명이 風前燈火(풍전등화)처럼 되자 국방의 제1선으로 나라를 지키던 곳이기도 하다.
훼손된 문학산성
현재 복원한 모습
표지석
그러나 1958년 김정렬 시장(작고) 때 동문을 개수한 이래, 남구청 주관으로
2009년부터 3년에 걸쳐 문학산성을 복원했는데 옛 모습 그대로, 원래의
축성방식으로 복원되었길 바란다. 더불어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군부대도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인천의
역사를 대표하는역사 ,생태공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를 학수고대한다.
별도 멘트
문학산성은 비류의 옛 도읍지.삼국시대 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
조그만 산성이 산봉우리마다 있다.
군부대가 유적지 발굴에 장애 요인이다.군부대가 이전해야 하며 이전하면 유적 발굴로 문학산 주변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고 중요한 유적지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체육공원이 아니라 역사공원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계양산성은 주변 발굴 조사에서 3천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국비 30억,시비 45억,구비 5억원 합 80억원을 들여 ‘계양산성 박물관’을 짓는다는
발표가 있었다.부러웠다.
우리는 인천의 원조인데.‘우리도 발굴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원인재(元仁齋) ; 고려의 대표적 문벌로,고려 초 왕족과 혼인관계를 이룰 정도로 강력한 호족세력이었던
인주 이씨의 시조를 모시는 사당.
연수구를 개발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현재의 원인재역 근처로 옮겨졌다.
본관이 인천인 성은 6개로 李,蔡,河,貢,全,文씨이다.
11) 안관당(安官堂)
안관당이란 관의 힘으로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란 뜻이다. 인천부사 김민선은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 왜적과 싸우다 1593년 병으로 순절했는데 구국의 횃불이었던 그는 죽어 혼령이
되어서도 문학산을 못 떠났다. 병란이 있을 때마다 목마를 타고 창과 칼을 휘두르며 문학산 주위를 돌아다니며
어리석은 후손들을 일깨워 주었다고 하며, 임란 후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도 동리 노인들의 꿈에 크게 노한
김민선이 자주 나타났으며 당시 인천부사 역시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마을 사람들은
김민선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가 순국한 문학산성 위에 사당을 짓고 김민선 내외분의 목조상을 모셔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제사의 영험이 대단하여 제사 중 부락에 도둑이 들면 발이 담에 붙어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었다 한다. 그런데 구한말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 심해지자 안관당도 수모를 당하게 된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사모지고개 너머 지금의 청학동에 살던 최씨 문중의 어느 부인이 예수교를 믿으면서
이 안관당 할아버지의 험상궂은 꼴을 흉보며 우상이라고 비웃으며, 그 앞에서 비는 마을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욕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그 부인은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바보천치처럼 생겼고, 사람들을 보면 안관당
할아버지처럼 눈을 부라리고 주먹총을 놓으면서 “씨익 씨익”하고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아이를 ‘씨익할네’라고 불렀으며 저주를 받아 병신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또 천주교가 포교된 후
천주교에 입교한 호장 박좌수가 안관당의 제사를 미신이라 하여 반대하였고, 그의 아들 형제가 당을 불
지르고 그 주변의 고목인 느티나무를 잘라버렸으며 사당마저 헐어버렸는데 벌을 받아 즉사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어찌된 영문인지 뜻하지 않은 재앙이 자주 일어나, 마을 사람들은 안관당의 제사를 중단한 때문이라
여겨 매년 10월 초에 부락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당자리에서 동제를 지냈으며 최후의 당주는 문학동의
이윤경씨라고 하는데, 비록 당은 없어졌지만 그 영험이 대단해 술밥을 만들어 종이에 넣고 짚으로 싼 후 제사를
드리고 나면 금방 술이 익어 제꾼들이 나눠먹고 하산하였으며, 제사 후 부락민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태웠는데
다 타지 않고 남을 경우 그 사람은 불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미군의 군사기지로 쓰임에 따라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고 따라서 제사도 중지되고 말았다.
안관당 동제, 외세의 침략에 맞서 목숨까지 초개같이 버리며 용감히 싸우던 김민선 부사의 다부진 모습이
문학산 주변을 감돈다. 동제로까지 승화된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천의 얼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잠시 인천시민의 날 전야제 길놀이로 안관당 동제가 열렸다가 지금은 또 사라져 버렸다. 다시 부활하여 인천
시민의 축제로 자리 잡을 날을 고대해 본다.
별도 멘트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인천부사 김민선의 사당이다.
군부대 근처 마을에 있었다고 하며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구한말 천주교인이 불을 질러 건물은 현재 소실돼 없는 상태이다.
동제(洞祭);동네에서 지내는 제사.근래 인천기계공고에서 안관당 동제를 지냈다.
12) 연경산 정자(연경정)
사모지 고개 꼭대기에서 연경산으로 10여분 정도 오르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 산
정상에는 정자가 있다.
이곳에 오르면 인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뒷받침하는 능허대가 보이고
월미도,자유공원,
수봉공원,계양산,철마산,소래산 등 인천 시가지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서울의
북한산까지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모습은 장관이라 한번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또 해뜰 무렵,
문학산을 배경으로
안개가 깔릴 때면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아늑하고 포실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인천 팔경 중에
문학산의 맑은 아지랑이를 꼽고 있는데 이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 인천 시민이 자연의 소중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인천 역사의 산
증인인 문학산과 연경산이 차례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연경산은 이미
학익동 쪽으로 7부 능선까지 깎여 나갔으며, 인천의 옛 도읍지이며 진산인 문학산은 터널 공사로 인해 이미
산자락이 깎이고 관통되어 있다. 鶴翼洞(학익동), 멀리서 보면 마치 커다란 학이 날개를 펴고 포근히 자리
잡은 형상인데 이제는 날갯죽지를 다 뽑아내고 깁스한 모습으로 숨을 할딱이고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산자락 밑으로 낼 수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 서해안은 한창 매립공사 중인데 그 매립지를 따라
고속도로를 내는 것이 경비나 경치 면에서 훨씬 효율적인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땅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과연 나만의 것인지 묻고 싶다. 우리는 이 땅을 잠시
빌려 사는 것이 아닌가? 우리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이 땅을 우리가 소중히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보존할 것인가? 또 우리 후손들은 선조들의 이러한 모습에 과연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전국 제일의 공해도시 인천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녹지를, 산소의
저장고인 산을 마구잡이로 헐어서야 체면은 둘째로 치고 사람 사는 꼴이 말이 아니다. 신선한 공기, 쾌적한
환경은 우리의 노력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심어 녹지를 늘려나가도
시원찮은 판에 있는 것조차 보존 못하는 시민 정신의 실종이 아쉽다.
뿌리 없는 도시 인천, 고향 상실의 무력감에 빠져 있는 인천인은 이제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이 땅이 바로 내가 누릴 땅이요, 이 땅이 바로 우리의 피붙이들이 살아가야 할 땅이라는 자각이 싹터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화 유적지를 보존하고 자연을 더욱 가꾸어 우리의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남구의 중점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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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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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중산층 기준(경제적기준, 정신적 가치)
1. 두어 칸 집, 두어이랑 전답, 겨울솜옷과 여름베옷 각 두어 벌2. 서적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햇볕 쬘 마루 하나, 차 다릴 화로 하나,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
3. 의리를 지키고 도의를 어기지 않으며 나라의 어려운 일에 바른말 하고 사는 것
별도 멘트
너무 경제적인 것에 치우치다 보니 중산층을 분류할 때도 富에 관한 것이 거의 모두가 된 세태가 안타깝다.
조선시대에는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었다.
*우리들이 어느 정도로 행복한 사람인지를 측정하는 행복지수(幸福指數)
* 다음 10가지 사항을 기준으로 행복지수를 측정한다. (○, ×를 하시오)
1) 나만의 독특한 인생관과 철학이 있다. ( ) 2)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를 지니고 있다. ( ) 3) 항상 의미 있는 과제와 목표를 가지고 있다. ( ) 4) 인간관계가 다양하고 원만하다. ( ) 5) 늘 활동적이다. ( ) 6) 꾸준히 자아실현(自我實現)을 한다. ( ) 7) 자신을 잘 절제(節制)한다. ( ) 8) 다른 사람의 행복과 발전에 관심이 많다. ( ) 9) 자유와 자율성(自律性)을 누리며 산다. ( ) 10) 가정생활이 행복하다. ( ) |
(위의 10사항 중에 긍정적인 대답이 7개 이상이면 행복지수가 높고, 5개 이하이면 행복지수가 낮다.
자신의 행복지수가 몇 점인지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람.)
별도 멘트
행복이란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얼마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삶의 목표는 행복이고 가치는 성취이지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다.富는 물론 사회적 지위에 대해 어느 정도
선에서 만족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족해야 행복하다. 원만한 인간 관계와 취미,목표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항상 성취 가능한 목표를 만들어 이를 이루어 가는 데서 삶의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다.